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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故)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봄이었다. 그분이 경제기획원의 신임 경제기획관으로 부임하셨을 때 나는 경제기획국 투자2과 사무관이었다. 공무원을 시작한 지 4년이 채 안 된 신참이었다.
새 경제기획관 사무실에는 훤칠한 키에, 해맑은 얼굴, 유난히 번쩍이는 안경렌즈에 눈동자가 맑은 분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앉아 계셨다. 일견으로도 보통 분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의 몸에 밴 겸손함, 사심 없고 청렴하며, 강직한 성품, 상대방에 대한 배려, 그리고 탁월한 설득력, 경제를 내다보는 혜안과 식견에 점점 매료되어 갔다.
나는 그분이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가실 때까지 약 5년 동안 그분의 부하직원으로 지내는 행운을 누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시기가 나에게는 너무 행복했었고 또 그리워진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제4차 경제 사회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을 했다. 우리나라는 1960년 대 이후 고도성장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지만, 연간 20~30%대의 물가상승률과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 중화학공업 부문의 과잉설비 문제 등 정부주도의 성장이 가져오는 구조상의 문제가 점점 고착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경제기획관과 경제기획국장으로서 나라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안정화, 개방화, 자율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노력은 그분이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가면서 국가의 경제 정책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는 부가가치세 도입, 교육세 도입, 금융실명제 추진, 제로베이스 예산 편성, 통신 개혁, 수입 개방과 금융 자율화의 추진 등 경제 각 부문에 걸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분을 ‘현실을 모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 비판을 받거나 개인적인 중상모략을 받아가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을 설득해서 내 편으로 만들어가면서 일을 추진하셨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경제 현상이라도 아주 쉽게 설명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1980년 대 초 군사정부 시절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한국 정부에 ‘닥터 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국인과 외국 투자자들에게는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그는 1980년 대 경제 정책의 밑그림을 그렸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986년부터 우리나라는 고도성장, 국제수지 흑자, 물가 안정이라는 세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눈
1979년에는 12.12 사태라는 군사 정변이 있었고 제2차 석유파동으로 어려움이 닥쳤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0년 경제전망에 관한 부총리 주재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는 재무장관, 상공장관과 기획원의 간부들이 참석했다.
회의 주요 의제는 1980년 경제성장 거시지표 전망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국의 국장은 새해에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5% 정도 성장할 것이라고 비관적인 보고를 했다. 지금은 우리 경제가 5% 성장한다고 해도 고도성장이라 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5%는 매우 낮은 성장 전망치였다. 그런데 김재익 국장은 새해 국내외 경제 상황을 설명해가면서 “1980년도 경제성장률은 0%가 될 것입니다.”라고 보고 했다. 일순간 분위기가 바뀌었고, 아마도 사전 설명을 듣지 않았던지 다른 간부들도 약간 당황해 하는 분위기였다. 그 때 장관실의 스산했던 분위기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실제로 1980년 성장률은 마이너스 1.5%였다.
(다음호에 계속) < 저작권자 © 강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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