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품에 엎어지는 연유

한판암

산의 품에 안기면 세속의 때가 더께더께 덮여있는 영혼이 정갈해져 맑고 티 없는 자성의 눈이 트일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게다가 흐리멍덩해진 총기까지도 되돌아오리라는 은근한 욕심 또한 그에 버금가는 미쁨이다. 언제 찾아도 어머니의 너른 품 같이 안온하다. 그럼에도 지엄한 법도나 철학을 들먹이면서 야멸치게 내치거나 험한 지청구를 하지 않아 되레 민망한 때가 숱하다.

산을 사랑하고 즐겨도 문리를 제대로 터득한 전문 산악인이나 등산가와 견줄 계제가 못되는 어정잡이일 뿐이다. 그들이 황후장상의 씨앗인 성골이나 진골이라면 나는 보잘 것 없는 천출의 초라한 날갯짓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겨냥하는 산에 대한 가치관이나 철학과 내 견해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엄연히 존재한다. 나는 산을 즐겨도 기껏해야 간편한 준비로 동네 뒷산 오르내리는 멋에 겨워서 우쭐대며 흥얼거리는 게 고작이다. 이는 세작이 봉황의 높은 뜻과 넓은 마음을 닮거나 따를 수 없음과 같은 이치이리라.

제 멋에 겨워 사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비록 산을 대하는 격이 이름 없는 필부의 처지를 맴돌아 초라하고 추레한 모양새일지라도 움츠러들지 않고 깜냥대로 즐기며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의 부자이다.

때로는 먼동이 트기 전인 깜깜한 첫 새벽에 그의 품에 안기면 퍽 상쾌하다. 이 경우 손전등이나 헤드랜턴(head lantern)으로 길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지날 때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신문지를 준비했다가 둘둘 말아 횃불을 밝혀 두려움을 잠재우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짓도 불사한다. 희뿌연 여명이 밝아 오기 전 등산은 잡다한 생각 없이 걸을 수 있어 좋다. 오직 길바닥을 살피며 걷기에 몰입해야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는 낭패스러운 불상사에서 자유롭다. 그렇게 걷다가 어둠이 걷히며 시퍼렇고 희뿌연 여명이 밝아오면 미지의 신천지와 조우하는 기분을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다.

새까만 새벽의 산길은 무언가를 잔뜩 꿈꾸는 미지의 세상이 열릴 것 같아 흥분과 설렘 속에 맞게 마련이다. 얼마 동안 무념무상의 상태로 어둠 속을 걷다가 동녘에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 신을 대하듯 받들어 모시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를 연다. 한편, 아침에 나서는 산길은 싱그럽고 힘찬 서기를 담뿍 폐부로 빨아들일 것 같아 절로 힘이 솟고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이에 비해 석양이나 저녁 어스름의 산길은 하루를 돌아보는 되새김을 통해서 자신을 투영해보며 생뚱맞게 엄숙해지게 마련이다.

같은 산길인데도 맛과 멋은 같은 날에도 어느 때에 걷느냐에 따라 사뭇 판이한 게 자연의 묘미이다. 그런 까닭에 계절에 따라 산이 주는 느낌이나 메시지는 전혀 다른 모습과 때깔로 다가온다.

약동하는 봄의 산길은 치장을 즐기는 젊은 여인네처럼 무척 화사하고 역동적이다. 연록의 향연이 펼쳐지는가하면 성정 급한 봄꽃이 앞을 다퉈 꽃망울을 터뜨리는 환희로 마냥 싱그럽고 무진장한 희망과 꿈을 그리게 하는 사랑의 노정이다.

여름의 산길은 울울창창한 숲이 빚어낸 우거진 녹음이 싱싱하고 짙푸른 세상의 잔치 마당 같다. 하지만 뙤약볕이 부담스럽고 비지땀을 흘리며 헉헉대는 만만치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등정의 맛을 즐길 수 있기에 난관을 극복하려는 다부진 각오가 선결충족조건이다. 그런 때문에 고진감래의 참뜻을 깨우쳐야 하는 게 여름 산길의 이치이다.

가을은 산길은 결실이 영글어 가는 환희를 만끽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달뜨게 하는 만산홍엽의 단풍으로 자칫하면 내가 누구인가를 잃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한 살이의 끝자락에서 돌아봄과 조락(凋落)의 묘미를 되새기면서 자연으로 회귀를 아귀 맞춰보며 자신의 삶을 타인의 거울로 들여다보는 자세가 절실한 계절인데 말이다.

겨울 산길은 텅 빈 산야에 벌거벗고 잔뜩 웅크린 나목을 향해 혹독하게 불어대는 삭풍과 동장군의 훼방이 따르더라도 맑고 청정한 진아(眞我)의 모습과 마주하며 돌아 볼 수 있는 맹성의 계절이다. 허례나 허식의 겉치레를 훌러덩 벗어버리고 나서는 모양새가 참 모습을 찾아가려는 구도의 길과도 상통한다는 견지에서 이르는 얘기이다.

삶을 위한 일터 지키기나 누군가를 찾아 실마리를 풀거나 해결해야 할 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자유인이다. 결국 꼭 매조지해야 할 일이나 찾아 가거나 찾아올 사람이 별로 없는 세상의 한가로운 길을 만보(漫步)하더라도 손가락질 받지 않을 세월의 강을 훌쩍 건넌 지금이다. 이런 터수이기에 참된 나를 돌아보며 부질없고 껍데기뿐인 탐욕이나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선언이 어색하지 않은 산길이다. 그렇다고 등산길이 명산 준령이거나 심산유곡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 그저 집 근처의 야트막한 산으로 간편한 아웃도어(outdoor) 차림에 생수 한 병 손에 쥐면 만사형통이다.

등산길에 빈틈없이 지키려는 철칙이 있다. 먼저 피치 못 할 예외가 아니라면 동반자 없이 나 홀로 등산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와 무리를 이루면 호흡 조절이나 걷는 속도 같은 잡다한 배려와 제약이 따를 뿐더러 내 자신이 동행의 호흡이나 감흥 조절에 치명타를 안기는 걸림돌이 될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아울러 등산길엔 지갑을 지참하지 않는다. 자칫하다가 하산 길에 누군가와 배가 맞아 소주라도 한잔 걸친다면 하루 헛농사를 지은 격이기에 오그랑장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결기의 상징인 셈이다.

산은 텅 빈 무채색의 청정 공간으로 거기에는 탐욕이나 번뇌를 비롯해 교만의 찌꺼기나 일그러진 흔적이 없어 맑고 밝아 명경같이 투명한 영지이다. 평지보다 조금 우뚝 솟아난 수목의 천국일 뿐인데도 세속의 풍진이 오염시킬 수 없는 청아한 공기와 바람이 터줏대감인 별천지이다. 그런데도 삶의 허접한 찌꺼기를 뒤집어 쓴 모양새로 산의 온유하고 청청한 품을 파고들기를 되풀이 한다. 하지만 야멸치고 박정하게 내치거나 허물하지 않는 너그러움은 자연의 섭리인가 아니면 끝 모를 모태(母胎)의 사랑법을 닮음 이련가!

삶에 부대끼며 버겁게 쫓다가 변곡점 언저리에서 돌출하게 마련인 고민이나 미욱한 욕심과 드잡이를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끌탕으로 이어지는 게 다반사이다. 이런 정황을 맞닥뜨리면 불현듯 산이 그리워 앞뒤를 따져보지 않고 휘적휘적 집을 나서는 게 이즈음의 버릇이다. 이 길에 내가 모르는 나와 만날 수 있다거나 새로운 세상의 섭리를 깨우칠 실마리라도 가외로 얻을 수 있다면 더할 수 없는 보람이며 희열이 될 터인데 무심한 세월은 제 갈 길을 예와 다름없이 무심히 흘러갈 뿐이다.

 

▲ 한국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객원논설위원 문예지 [출판과 문학] [詩와 늪] 고문 [문예감성] 심사위원수필집 [8년의 숨가쁜 동행], [가고파의 고향 마산](해드림출판사) 외 다수 현 경남대학교 공과대학 컴퓨터공학부 명예교수(경영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