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약속

김혜영

아버지를 꿈에 뵈었다.

그날처럼 아버지는 쪼그려 앉아 소쿠리에 돌을 주워 담고 있었다.

“막내야, 아무것도 못해 줘도 섭섭해 허지 말어 애비가 능력이 웁는걸 어뜨커냐. 그대신 저 논은 다 너한티 줄겨.”

아버지는 끝내 얼굴을 들어 내게 보이지 않으셨다.

그날도 그랬다. 그 얘기를 하면서 내 눈을 보지 않으셨다. 함이 들어 올 때가 다 돼 가도록 어둑어둑한 밭에 앉아 소쿠리에 돌을 주워 담고 계셨다.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가난한 아비의 마음을 주워 담느라 해가 저물도록 일어날 수가 없었나 보다.

“아버지 왜 여태 이러구 계셔? 금방 신랑 친구들 올 텐디 빨리 들어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뜻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 곁에 나도 앉았다. 아버지는 대꾸도 않고 한참을 돌 고르는 일을 하셨다. 그리고 어젯밤 꿈에서처럼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흔여섯에 낳아 고등학교만 간신히 졸업 시켜놓은 딸이 저 혼자 뚝 떨어져나가 몇 년 직장 생활을 하더니 스물다섯 나이에 결혼할 남자를 데려왔다. 그렇게 약혼을 하고 일 년 뒤 결혼식을 올리고는 삼 일 만에 바로 일본으로 간다니 섭섭했을 것이다.

뭐든 나 혼자 해결하며 살았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았고 결혼 비용조차도 전혀 도움 받지 못했다. 부모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부모의 경제적인 능력을 알고 있었다. 직장 다니며 야간에 공부를 하느라 벌어놓은 것도 없었다. 적금 이백 오십 만 원만으로 결혼을 했다. 신혼을 소꿉놀이 하듯 타국에서 시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아비의 마음은 그런 것이었을까.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자식에게 미안했으면 먼 훗날 논 몇마지기로나마 떠나가는 딸자식을 달래주고 싶었을까. 그 순간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복잡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날 그 밭에서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안 되지만 내 것으로 알고 살았다. 환산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하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초, 중, 고를 함께 다니며 친해진 친구가 있다. 내가 늦둥이 막내인 것에 비해 젊은 부모의 맏딸인 친구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타고난 운명 탓인지 부자인 친구들은 부럽지 않았다. 난 어려서부터 오로지 젊은 부모 있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 친구를 처음 우리 집에 데려갔을 때 많이 놀랐다고 한다. 왜 아니었겠나. 자신의 할머니만큼 나이 많은 할머니가 친구의 엄마라니.

오랜만에 친구와 천리포수목원에서 만났다. 마침 수목원을 처음 방문했던 것도 고등학교 시절 그 친구와 함께였으니 우린 공유하고 있는 지난 시간을 추억하기 좋았다. 수목원의 6월은 꽃도 예쁘지만 신록이 깊어져 마음속에 안정을 준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습관처럼 그곳에 간다. 겨울에는 겨울 나름의 쓸쓸함이 좋아 찾고 봄이 오면 식물들의 생명력이 리얼하게 살아나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며 찾는다. 무엇보다 여름의 수목원은 초록이 한층 깊어져 온몸의 세포 하나까지도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한참을 둘이서 옛 시절 이야기 나누며 수목원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다리가 피곤을 느낄 때쯤 수목원의 연못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다 귀향 이야기가 나왔다. 딸만 다섯인 친구 아버지는 딸들 앞으로 여기저기 조금씩 땅을 마련해 놓으셨다고 한다. 딸들이 귀향해서 가까이 이웃해 살라고, 그러면서도 너무 가깝지 않게 몇 분 거리의 곳곳에. 그러니 자신은 남편의 퇴직에 맞춰 귀향할 생각이니 나도 내려와서 함께 이웃해 살자는 얘기다.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 한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찬바람이 드나들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놓기 싫은 말 ‘친구야 이제 내겐 아버지도 아버지의 약속도 남아있지 않단다.’ 명치가 아프다.

친구와 만나서 나눈 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밤 새삼 그날의 일이 꿈에서 드라마의 재방송처럼 재현된 것은. 이십 년 전의 일이고 그리운 아버지는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다. 세마지기 논은커녕 세 평의 땅도 나는 가지지 못했다. 고향에 갈 때마다 그 논을 바라본다. 아직도 못 견디게 아버지가 그립다.

<논을 돋우어 예쁜 집을 짓고 집 주변에 좋아하는 야생화를 심는다. 집과 별도로 방 한 간짜리 작은 별채를 지어 서재로 쓴다. 고향 땅이 한 눈에 펼쳐 보이도록 창을 낸다. 창을 마주 보도록 커다란 책상을 들여놓고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쓰면서 늙어간다.> 여기까지가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꿈꿔온 나의 귀향의 꿈이었다.

새벽에 깨었다. 얼굴이나 좀 보여주시지 끝내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또 한 번 헛된 꿈만 꾸게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은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그때만큼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내가 흠뻑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날 이후 십 년 간은 꿈 꿀 수 있어서 행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