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 여름날 그리고 비

이 기 화

참 좋은 세상이다.

버튼만 누르면 밥이 되고 빨래가 되고 손만 대면 자동으로 물이 나온다.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서 손과 발은 편해졌지만 사람냄새 나고 정겨운 것은 저만치 물러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수도꼭지에서 힘차게 쏟아져 나오는 물을 보다가 옛날의 수도인 우물에 얽히고설킨 일들이 떠오르며 마음은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고향으로 달려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동으로 물지게를 지고 마당을 지나 흰 박꽃 넝쿨이 올라간 헛간을 지나 길돌이네 집 옆에 우물로 간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보이고 사이로 뭉게구름이 지나간다. 줄을 내린다. 두레박이 신나게 춤을 추다 물에 닿으면 손으로 물을 푸듯 두레박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차게 내저으면 두레박속으로 물이 가득 들어간다. 줄을 잡아 올려 몇 번이고 두레박질을 하여 물통이 차면 물지게를 지고 돌아온다. 물이 출렁거려 물통에서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길을 만든다. 네 번 갔다 오면 큰 물 항아리 큰 물솥 고무다라 등등 줄을 세워놓은 크고 작은 그릇들에 물이 가득 채워진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온통 물이다. 물지게로 인해 몸은 힘들었지만 물을 바라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아니 신이 났다. 그 우물은 수화 아버지 한복이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셋이서 합작하여 비용을 대고 우물을 같이 파서 만든 공동우물이었다. 수화 네가 이사 가고 그 집으로 길돌이네가 이사를 왔는데 길돌이 어머니는 물을 길러가는 내게 물 다 퍼간다고 얼마나 욕을 해대는지 모른다. 귀가 따가울 정도였지만 당당히 자격이 있기에 꾹 참고 물만 길었다. 어머니께서 집에 돌아오시면 물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마음이 뿌듯했다. 그물로 설거지도 하고 걸레도 빨고 밥도 하고 여러 가지로 쓰였다.

사람들에게 길돌이 어머니는 경우도 없고 푼수기가 있기도 해서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내가 그때 물 욕심을 내다보니 욕을 얻어먹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가뭄이 들면 집 옆에 있는 우물엔 물이 덜 고여 집에서 먼 우물로 가야 한다. 그곳은 아무리 가물어도 옹달샘처럼 물이 넘쳐났다.

이집 저집 어머니 언니 등 아낙네들은 다 모여 보리쌀도 닦고 열무 배추 등 채소도 씻으며 누가 누구랑 연애 한다느니 누가 결혼을 한다느니 누구는 여자 집에서 반대해서 상사병이 났는데 여자 쪽에서 부모가 반대를 해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여 위태하다느니 누구는 코피 나도록 공부하여 대학에 붙었으며 누구 네는 딸을 내리 여섯 낳고 아들을 낳았다더라. 우물가엔 사랑도 있었다. 누구네 형은 할 일도 없으면서 우물가에 기웃거리며 아가씨인 누구네 언니를 보러 오는 게 어린 내 눈에도 그 모습이 보였다.

우물물은 겨울엔 따듯하고 여름엔 얼음처럼 차가웠다. 엎드려 등목을 하면 너무 시원했다.

우물 속에 오이냉차를 만들어 먹는 것도 별미였다. 오이의 속을 파내고 막대기를 십자로 위에 꽂아 실로 묶어 길게 늘어뜨려 우물에 넣어 꺼내먹으면 그것도 상큼하고 시원했다. 하여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우물가엔 그칠 새가 없었다.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 끝났을 때 여름이었다. 가물어 물이 잘 나오지 않아 큰 고무통에 물을 받아놓고 쓸 때였다.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3살 먹은 아들이 막 달려온다. 점프를 하더니 물통에 들어가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아들을 잽싸게 들어올렸다. 그때 보지 않았다면 무척 위험했을 것이다. 아들이 20대가 되었는데 그 얘기를 하면 빙그레 웃는다.

고인 웅덩이에 비가 점을 찍는다. 작은 점 밖으로 작게 크게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여름비에도 빼놓을 수 없는 어릴 때 추억이 있었다. 비만 오면 소쿠리나 얼기미(어레미의 사투리)를 가지고 집 옆 용척골 냇가로 갔다. 가에 얼기미를 놓고 발로 훑어 내리면 고기들이 모여드는데 재빨리 얼기미를 드는 것이다. 비가 오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 사람들은 비를 타고 하늘에서 고기가 내려오는 거라고 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참 이상했다. 크고 작은 송사리 미꾸라지 새우 피라미도 있지만 가끔은 반짝반짝 빛나는 붕어가 잡혔는데 붕어는 가슴이 콩닥거리는 고객이라 대환영이었다. 잡으면서 붕어가 몇 마리인가 세어보는 재미가 솔솔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지개 빛을 내는 예쁜 물고기도 잡혔다.

비온 날 잊지 못할 일도 있었다. 4학년 때였다. 집주변에 같은 또래가 남자애들은 많았지만 여자애들은 없어 한두 살 많은 언니들과 놀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20분 거리에 있는 큰 냇가로 목욕을 가자고 했다. 낮에 가도 되는데 왜 캄캄한 밤에 가야 되냐고 불평(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유는 언니들이 젖가슴이 나올 때임)했다. 작은 내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사는 주변에 있기에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정한 것이었다. 웃고 떠들면서 냇가에 도착하니 비가 온 뒤라 흙탕물이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야트막한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한번 앞으로 가볼까 하는데 허리까지 물이 닿는가 싶더니 획하고 허리를 낚아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속에 쑥 들어갔다 나오면서 물을 많이 먹었다. 떠내려가고 있는데 언니들이 손을 잡고 나를 잡으려는 모습이 아련히 보였다.

그 이후 나무를 붙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리저리 손을 내저으며 잡으려고 사력을 다했던 것이었다. 걸어 나오는 나를 발견하고 언니들은 도망을 가는 게 아닌가? 귀신인 줄 알고 그랬던 것이었다. 버드나무 붙잡고 나왔다고 하니 그제서야 안심하며 걱정을 많이 했다고 집에도 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고. 머리가 비어있는 느낌이 들며 몽롱했다. 코는 맵고 기력이 하나도 없었는데 집에 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하는 언니들의 약속을 지키느라 한 마디도 못했다. 수영도 못하는 입장에서 물의 위력에 놀라고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다른 날은 허리에 물이 차도 괜찮기에 안심했던 내게 물살이 셀 때는 위험하다는 것을 그때 알게 해 준 것이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그날 물이 경고장을 내밀며 내게 준 교훈은 참 컸다.

비가 오면 지나가는 차가 물웅덩이 물을 퍼내며 옷에 무늬 그려주지 벌을 서듯 우산 들고 가야지 그리 반갑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고 속상해하시는 분도 있다. 그래도 비는 추억을 불러주고 추억을 아름답게 하고 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도 한다. 토란잎 위에 은구슬을 만들어 굴리는 비는 영롱한 무지개를 만드는 재주도 있다.지금 그 우물들이 사라진지 오래다. 고향에서 있었던 우물과 비는 정겨웠고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비를 남달리 대하는 친구가 있었다.

비가 오면 너무 좋아 우산도 안 쓰고 비를 반기는 그 친구. 오늘 그 친구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사진설명]

수필문학 등단.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원. 여울문학동인 회원.

문협숲문화개발위원, 웃음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