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고사 김자인(본명 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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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모든 것이 풍요롭다. 이른 봄 씨앗을 틔워 여름 내내 튼실하게 키워낸 열매들이 알곡으로 여물어 햇곡식을 선물한다. 이를 감사히 여겨 예전에 농가에선 가을 고사를 지냈다.

그 시절 농경사회의 토속신앙으로 농사지은 쌀로 햅쌀밥을 지어 조상님께 예를 올리거나 떡을 만들어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시월상달에 지내는 고사는 가족의 평안, 재수를 축원하고, 재액을 물리치기 위한 의식이었다. 이를 성주고사, 안택고사, 가을 떡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 가을이면 더 바쁘던 어머니는 떡을 잘 만드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집안의 대소사에 떡은 필수 음식이었다. 쌀이 떨어지거나 보릿고개엔 그마저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농한기에 중요한 손님이 오면 미리 떡을 해서 대접하셨다. 인절미, 콩버무리, 수수팥단지, 시루떡 등을 자주 하셨는데, 쌀가루에 팥을 켜켜로 얹어 쪄낸 시루떡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추수가 끝난 음력 시월상달엔 잊지 않고 시루떡을 해 고사를 지냈다. 통북어에 실타래를 묶어 시루 손잡이에 꽂고는 냉수 한 사발과 함께 소반 위에 올리셨다. 그리고는 대들보가 있는 마루에서 어머니의 치성이 시작되었다.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정성들여 지내는 고사는 햇곡식을 먹게 해준 집안의 신과 조상님께 곡진한 예를 올리는 의식이었다.

어머니는 햅쌀이 나올 시기에 벼가 익지 않았으면 풋바심을 해서라도 햅쌀밥을 지어 어머니의 신께 예를 올리셨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동네 어느 집에서 큰 굿을 할 때에도 돼지머리와 술, 시루떡은 빠지지 않았다. 굿이 끝나면 마을 잔치가 벌어지고, 구경꾼들은 막걸리 한 잔에 돼지 머리와 시루떡을 얻어먹었다. 시루떡이 쓰였던 것은 붉은 색의 팥이 귀신을 물리치거나 잡귀를 쫓는다는 속설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어머니의 시루떡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여간 공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쌀과 찹쌀을 반씩 섞어 물에 불리고 헹구어 절구에 빻아 고은 체에 내리셨다.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에 시루 밑을 깔고, 쌀가루와 삶은 팥을 켜켜로 얹은 다음, 무쇠 솥에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때셨다.

떡이 다 익었다 싶으면 뾰족하게 다듬은 나무 막대로 찔러보셨다. 그 막대에 날가루가 묻지 않고 깨끗하게 나오면 어머니 얼굴은 반들반들한 미소가 번졌다. 날가루가 묻어나오면 부정 탄 것이라고 여겨 고개를 갸우뚱하며 혀를 끌끌 차셨다. 혹여 무슨 잘못이나 한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여미셨다.

정월 대보름엔 시루떡을 담아 장독대, 대문, 부뚜막, 변소, 다락 등에 갖다 놓고 고수레를 하셨다. 집안의 모든 신들에게 정성을 다함으로써 가족이 무탈하기를 기원하셨던 것이다. 그 의식이 끝나면 이웃집에 떡 돌리기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만든 작은 목기에 시루떡 두세 조각씩 올려주면서 누구네 집에 갖다 줘라 일러주셨다. 가난한 집에는 몇 조각 더 얹어주셨다. 허기진 마음도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동생과 나는 달음질쳐서 떡을 돌렸다.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라” 하는 이웃의 말을 전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고, 어린 마음에도 무엇을 베푼다는 것이 기뻤던 것 같다. 그때는 그것이 순박한 정을 나누는 풍습이고 미덕이었다.

떡 돌리기가 끝나면 시루떡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 떡은 어머니 마음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배고픈 시절이었으니 꿀맛이었다. 밥 대용으로도 먹고, 겨울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동치미국물과 조청에 찍어 먹던 쫀득한 맛의 기억은 겨울 풍경이 되었다.

시루떡은 한국전통의 고유음식으로 오래전부터 잔치, 제사, 장례, 개업 등 집안의 대소사에 자주 쓰였다. 대부분 팥 시루떡을 하지만, 무를 채 썰어 넣으면 무채 시루떡, 호박고지를 말려서 넣으면 호박고지 시루떡, 대추를 넣으면 대추 시루떡, 곶감을 넣으면 곶감 시루떡 등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떡 이름이 달라지고, 그 나름의 맛과 향이 달라서 특별음식으로 고유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시루떡은 낙랑 유적에서 동과 흙으로 된 시루가 발견되었다 해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한다. 요즘은 각종 사업을 하거나 경조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그것은 좋은 일이 있을 때 복을 기원하고 액막이로서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이사 갔을 때 떡을 해서 나누어 주었더니 답례로 가루비누나 휴지, 과일 등이 선물로 들어왔다. 이럴 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로 오히려 미안한 감이 있었지만, 이웃 간의 정도 느끼고, 음식도 나누어 먹게 되니 시골인심 그대로 따뜻했다. 주는 사람의 뿌듯함과 받는 쪽의 고마움이 서로에게 안겨지니 행복바이러스가 저절로 일어난다고 할 수 있겠다.

시루떡을 보면 네모진 떡 속에 어려서 함께 살던 아버지 어머니와 육남매의 얼굴이 콕콕 박혀있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붉은 깃 동정 단 이불 덮고 잠자던 그때가 내 가슴에 와르르 안겨온다. 한 조각 떡 위에 뿌려진 팥고물이 고만고만하게 자라던 우리형제 같아 애잔하다.

요즘 떡집도 많이 생기고 각종 떡이 상품화되어 손쉽게 먹을 수 있다. 방앗간에 팥고물이 고물고물 얹어 있는 시루떡을 보면 입맛이 다셔지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시루떡 맛의 기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마음이 따뜻했던 그 시절, 가을 고사를 지내기 위해 시루떡을 만들던 어머니의 정서가 새삼 그립다.

김자인 약력(본명 김인자)

한국문인협회 회원.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주간역임. 실버넷뉴스 문화예술관 관장.

동대문문인협회 이사. 문학의집 서울 회원

저서 : 『그땐 정말 미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