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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최희명
자주 가는 농원은 넓이가 만여 평에 이르는 수원 지방의 명소다. 농원 안에는 웨딩홀, 실내수영장, 가든 등 건물이 여럿 있다. 봄에는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피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져, 어릴 적엔 친구들과 그곳에 일부러 찾아가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농원 안에는 미로처럼 길이 나 있는데 녹음 사이로 건물을 찾아가다 자주 길을 잃는다. 실내수영장을 왼쪽으로 두고 빨간 다리를 건너 오른 쪽으로 10미터 쯤 가다 매화나무 아래로 직진해야 하는데 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물의 뾰족한 꼭대기만 바라보고 걷다가 길을 잃는 것이다. 길은 눈으로 보고 걷기보다 길을 알고 걸어야 한다.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집을 나서면 오른쪽 골목으로 돌아갈 것인가 왼쪽 골목으로 꺾어갈 것인가부터 고민하게 된다. 보통 육안으로 볼 때 가까운 쪽으로 가게 되는데 사실은 육안보다 엄마와 다니던 길이다. 습관의 길이다. 자주 다니는 길은 익숙해서 편하다. 눈 감고도 찾아간다는 표현은 그래서 생긴 듯하다. 때로 버스가 다니는 대로변을 걷기도 하는데 습관처럼 버스를 따라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길은 물처럼 순리의 법칙을 따른다. 길은 생태요, 생활이다.
살면서 선택한 길 중에 잘못 든 길은 되돌아 나오면 되고 전공과목은 바꾸면 되지만 결혼은 그럴 수가 없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꽃길 위에 한 걸음을 내 디뎠을 때 이미 길은 정해진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생명을 창조한 사람과 사람, 둘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건 말 그대로 찢어짐이다. 둘이서 한 길을 가겠다고 선포한 사람들이 길을 나누어 가는 건 모순이며 상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이 갈라서는 건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살다가 아프게 갈라서느니 살아본 뒤 합치겠다고 근래에는 혼 전 동거가 유행처럼 번지는데 얼핏 보기에는 조삼모사 같기도 하다. 둘이 함께 가는 길과 돌아서 가는 길은 그만큼 서로에게 난제다.
시장에서 산 물건이 너무 무거워 걷기가 힘들면 버스정류장에 내려 잠시 쉰다. 집에 누가 있는지 전화로 확인하고 구원을 요청한다. 집에서 버스정류장 가는 길은 공원을 끼고 전화국 뒤쪽으로 가는 좁은 길과 가게들이 즐비한 넓은 길이 있다. 나는 항상 넓은 길로 다니는 데 아들은 늘 좁은 길로만 다니는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성미 급한 나는 내가 다니는 길을 따라 끙끙대고 걸으면서, 아들이 오는지 살피면서 화가 나고 아들은 제가 다니는 길로 가서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다 화가 나서 돌아온다. 걸어서 10분 거리인데도 결과의 차이가 그렇듯 심하다.
불가에서 말하는 도(道)는 길이다. 사전에는 이치, 방법, 근원, 기능, 인의, 사상, 덕행 등의 뜻이 있다고 적혀 있다. 사주를 배운 지인들은 ‘길을 묻는 그대에게’ 또는 ‘길을 찾는 사람들’ 등의 간판을 내걸고 사주카페를 열고 있다. 길이란 매일 가야 하지만 매일 매일이 마치 첫 경험처럼 낯설고 어려운 것이다. 매일 가는 차를 타고 매일 가는 길을 갈 때도 많은 날은 순탄하지만 어떤 날은 교통의 체증이 있고 어떤 날은 사고가 나기도 한다. 어제는 어제의 길이 있었고 오늘은 또 오늘의 길이 있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을 거울로 삼고 내일로 향하지만 어제의 일도 그제의 일도 교훈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생의 길은 때로 밤바다와 흡사해서 한 걸음만 궤도에서 벗어나도 미로가 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길은 사람의 역사다. 생명의 역사다. 마방들이 말 등에 차(茶)를 싣고 걸었던 일만 이천 리 차마고도나, 폭설에 고립된 사람들이 이웃과 소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뚫은 토끼길이나 스토리텔링 아닌 것이 없다. 사람이 살면서 한평생 걷는 길은 지구를 네 바퀴나 도는 거리라 한다. 나의 한 생을 마감할 때쯤 한평생 걸어온 175.000km를 되돌아보면 헛걸음은 얼마쯤 될까. 꼭 가야만 하는 길을 정확하게 헛걸음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런 후회도 없을까. 잘 걸었든 헛 걸었든 나의 길을 열심히 걸었다면 그도 하나의 역사가 될까.
앞만 보고 마라톤을 뛰 듯 살았던 적이 있다. 열심히만 살면 세상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돈이 되는 길이 보이면 무작정 덤벼들었다. 길의 참뜻인 이치, 기능, 인의 같은 의미를 새겨볼 여유가 없었다. 삶을 유턴하여 돌아보니 그때의 내 모습이 여지없는 불나방이다.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보이는 길들은 너무 깜깜했다. 어둠 속에 누워 나 스스로를 응시하며 보낸 시간들이 욕심을 비울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랜 응시의 시간이 흐르자 비로소 길이 보였다. 길은 마음속에 있었다.
야행성인 쇠똥구리는 달 없는 그믐밤에 은하수를 지표로 길을 찾아간다. 몸길이 2Cm의 작은 풍뎅이과 곤충이 인간의 육안으로도 볼 수 없는 먼 하늘의 별을 보며 쇠똥으로 빚은 똥경단을 운반해 가는 것이다. 필시 온몸의 기운과 온 영혼의 뿌리를 바쳐 찾아낸 빛일 것이다. 오로지 쇠똥을 운반하기 위해 은하수를 등대로 삼는 쇠똥구리. 경단 위에 거꾸로 서서 경단을 굴리며 별빛 따라 밤길을 가는 쇠똥구리. 거기에는 인간이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럿 있다. 당연히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다. 더운 여름에 지표면에서 올라오는 높은 온도를 피하기에 경단 위는 안성맞춤이라는 이유도 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명제, 종의 번식이라는 이유는 신성하기까지 하다. 쇠똥구리에게 쇠똥경단을 운반하는 일은 이치, 방법, 근원, 기능, 인의, 사상, 덕행, 즉 삶의 길인 것이다.
자주 다니는 길도 마음이 바쁘면 지름길을 찾다가 제대로 난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대충 짐작으로만 다니던 길을 잃으면 마치 세상 전체가 미로 같다. 새로 만든 도시일수록 길과 건물들이 비슷해서 길이란 길을 모두 헤매게 된다. 그렇게 헤매다보면 원점으로 돌아온다. 원점에서 바라보면 헤매던 길속에 가야할 길이 보인다. 길은 그렇다. 짐작으로 다니는 길은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할 길의 구분이 서지 않는다. 길을 잃고 헤맨 후에야 가장 정확하게 길이 보인다. 인생도 그렇다.
[작가설명]
2006년 월간 ‘예술세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밥차리미시인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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