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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
권덕출
눈을 떠보니 나는 여전히 승용차 안이다. 황소의 굵은 눈망울도 건장한 농부가 무논에서 쟁기질 하는 모습도 간 곳 없다. 황소의 육중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목에 걸려 흔들리는 소 방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졸았을까?
잠깐 다녀오겠다든 남편도 돌아오지 않은 채다. 엄동설한의 사나운 바람만 차체를 흔들고 마른 밭의 흙먼지를 산자락 솔숲으로 몰아간다.
차는 좁은 길을 비켜 밭 한 모퉁이에 새워져 있다. 동네는 시멘트 포장이 된 길 양쪽에, 몇 안 되는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이전에는 집과 길 모두 밭이었던 듯싶다. 키가 큰 대나무에 가려있는 집 너머로 유달리 큰 기와집이 보인다. 주위의 낡은 집들과는 현저히 대조를 이룬다. 유독 우뚝 솟아 있는데다가 서까래 사이의 흰 페인트가 선명하게 들어 나는 새 집이기도 하다. 새 집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내 눈에 파격적으로 보인 것은 아니다. 그 집 처마에 풍경이 달려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 상식으로 풍경은, 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저 풍경이 내 백일몽의 진원이었다. 소 방울 소리는 댕겅댕겅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는 풍경 소리에 연계된 것이 분명하다. 풍경은 나에게 ‘성불사의 밤’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저 처마 끝에 다는 경쇠를 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은 순전히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 구나” 하는 노래 가사에 기인한다. 겨울 아침나절의 동네는 인기척마저 없어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다. 비어 있는 들판에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는 마른 억새, 대나무를 흔들고 솔숲으로 내 닫는 바람, 그 바람 소리, 마치 문명과 단절 된 시원의 한 마을이 정지 된 것 같다. 적막한 동네의 분위기는 정말 무더운 날 농부가 베잠방이 걷어 부치고 구슬땀을 흘리며 쟁기질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나는 승용차 안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 속에 갇혀 백일몽을 꾸었고, 그 꿈은 나에게 시간을 초월하게 했다. 어제 밤 큰집에서, 아버님 제사 모신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큰집에서 만난 대소가의 사람들, 그들에게서 들은, 살면서 겪는 좋고 나쁜 여러 가지 얘기들이 기억 저 쪽으로 사라진 것 같다. 내 마음도 이 들판처럼 텅 비어 무심해진다. 큰 집에서 담아 온 여러 영상들도 지워지면서 자신이 맑아져 옴을 느낀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여자들은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아 키워야하며 장성하면 결혼을 시켜야 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낸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어야하는 피할 수 없는 이력들이다. 나이가 드니 여러 행사들이 피곤하고 그래서 지친다. 여자들의 집안일은 정년이 따로 없다. 살아갈수록 자손은 불어나 마음 쓸 일은 더 많아지는데 기력은 또 점점 줄어들기만 한다.
우리 모두는 정말로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죽은 사람에게 제사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회의적이다. 며칠 동안 너무 지쳐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생긴다는 늦은 이기심 때문인지 나는 이제 그만 이런 일들에서 놓여나고 싶다.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참 무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무료함 때문에 풍경을 보았고 홀로 있는 시간을 가졌다. 이 혼자 만의 시간은 어젯밤 잠을 설친 피로를 가셔 주었으며 풍경이 고조시킨 적막한 분위기에 자신도 속세를 벗어나 어느 산간 절에라도 온 기분이 들게 했다. 그리고 여자들의 거미줄과 같이 복잡한 인간관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심이 혼자 있는 시간에 발견한 자기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백일몽이 걸러준 시간의 여과는 집에 가서 몇 날이나 걸려야 회복할 수 있는 평상의 마음을 단시간에 해결해 주었다. 백일몽은 짧은 시간 에 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옛날 인도에서는 범종을 쳐서 시각을 알리고 인생무상을 경고했다고 한다. 나는 풍경을 내 마음에도 매달아 수척해 가는 마음도 달래고 인생무상을 일깨우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무심한 풍경은 여전히 부는 바람에 댕그랑거리고 동네도 깨어나지 않은 채 침묵 속에 잠겨있다. 남편도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없다.
약력
1995년 「 문학세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포항문인협회, 서라벌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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