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땐 왜 그랬을까
-까나리 액젓-
장은초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젊은 여자가 나에게 까나리액젓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느닷없는 물음이었지만 그녀의 장바구니를 보니 알 것 같았다. 멸치액젓을 샀는데 1+1로 까나리액젓이 덤으로 딸려있기에 자신에겐 필요 없다며 좋아하면 나더러 가지라고 했다.
낯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받자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내 쪽에서는 넉넉히 산 옥수수 몇 개를 건네주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예닐곱 살 남짓한 딸아이를 달고 온 젊은 여자는 옥수수를 고맙게 받아갔다.
평소에 내가 사서 먹는 제품은 아니었지만 까나리액젓을 보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TV 오락프로인 ‘1박 2일’에서 곧잘 까나리액젓이 등장한다. 아메리카노 커피와 거의 흡사해 컵에 담아놓고 빨대로 출연자들에게 한 모금씩 들이켜게 하고는 커피를 마시면 융숭한 밥상을, 까나리액젓을 마시면 아주 굶거나 쥐코밥상을 받게 된다. 이른바 복불복 게임인데 까나리액젓이 국민에게 낯설지 않은 식품이 된 건, 아마도 ‘1박 2일’이 크게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까나리액젓을 받아들고 내가 배시시 웃은 까닭은 따로 있다. 양심을 저버린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과거 어느 날의 기억 때문이었다.
내 성격상 누구에게 폐 끼치는 걸 가장 못 견뎌하면서 ‘그땐 왜 그랬을까’하는 물음표만 입속에 맴돈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였으니 어언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당시 1학년 엄마들은 일 년간을 교실청소 하러 다녔다. 직장 다니는 엄마들은 빠지고 전업주부들만 참여하다 보니 “전업주부가 봉이냐?”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대놓고 불평을 하다가는 내 아이에게 해로울까봐 전업주부 엄마들은 속을 끓이면서도 청소하러 다니는 걸 마다할 수가 없었다. 억지춘향이든 아니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당번이 되어야만 했다.
옆 동에 살던 아라엄마와 내가 같은 조가 되어 교실 청소를 마치고 오던 어느 날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까나리액젓을 나눠주고 있었다. C회사에서 처음 출시한 제품이라며 시식해 보고 많이 애용해 달라고 했다. 판촉용 액젓을 한 병 얻으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이래서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나 보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라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표엄마, 우리 까나리액젓 또 얻으러 갑시다.”
“이미 받았는데 얼굴 알아보면 어떡해요?”
“옷도 다른 걸로 갈아입고 모자 눌러쓰고 가면 모를 거예요.”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액젓 한 병 더 얻는데 성공했다. 오후 느지막할 무렵에 아라엄마가 또 가보자고 했다.
나도 욕심이라면 놀부가 울고 갈 욕심인데 아라엄마에게는 명함도 못 들이밀 것 같았다. 이번엔 어떻게 변장을 하지? 내가 가진 구두 중에 가장 높이가 있는 것을 고르고 스카프를 휘둘러 별짓을 다해서 그곳으로 갔다. 다행히 판촉사원들이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도 막바지에 이르러 어둠살이 뻗치기 전에 파라솔을 접고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우린 어렵잖게 세 병째를 획득했다.
자기 회사 제품을 꼭 애용해 달라던 판촉사원의 당부를 나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여긴다. 까나리액젓을 살 땐 반드시 C회사 제품만 사서 쓰는 소위 충성고객이다.
그날의 지질하고도 비루한 양심을 엇셈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욱 C회사 제품을 사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도 아라엄마도 서로가 살림 일구느라 한 푼이라도 아끼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할 때여서 변장술까지 해가며 아금받게 굴었지만 이젠 그 시절을 옛말 하듯 하며 살 나이가 아닌가.
문득 아라엄마가 그리웠다. 지인들에게 몇 단계 수소문했더니 아라네 식구들 모두 이민 가서 미국에 산다고 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강남 개포동 주공아파트 시절이 그립지 않을까. 짠순이로 죽이 척척 맞았던 나를 아라엄마도 기억할까. 한국에 살고 있다면 한달음에 달려가 밥 한 끼 나눌 텐데.
“그땐 왜 그랬을까”하며 손을 맞잡고 파안대소라도 하고 싶은데, 그리운 사람은 너무 멀리 있으니… .
멀리 있어 더 그리운가?
테마수필 필진
한국문협 회원
수필집 [엿을 사는 재미] 외
< 저작권자 © 강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