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만의 휴가

최종편집 : 2025.1.4 토 09:46

문학	[수필] 나만의 휴가 강남신문 \| kangnamnews@hanmail.net

승인 2017.06.30 11:32:10

나만의 휴가

이재월

에어컨을 한나절이나 틀었는데도 더위는 꺾일 줄 모른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가게 안으로 택배 기사가 짐 꾸러미를 가지고 들어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동생이 보내준 옥수수였다. 곁에 있던 남편이 어머니 생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친정 가서 며칠 쉬었다 오라고 한다. 남편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려두었던 나의 버킷리스트를 떠올렸다. 평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첫째 동생이 있는 인도에 가기, 둘째 자전거 타기, 셋째 동화 구연 배우기, 넷째 부모님 머리 염색과 이불 빨래 해 드리기 등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 끝에 부모님이 계시는 친정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승용차로 고속도로 위를 달릴 때는 차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흥얼거리기도 하고 휴게소에서는 통감자를 사 먹기도 했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친정에 가면 하루 이상 머문 적이 없었는데 부모님과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벌써 고향의 정취에 푹 빠져 추억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에 마당으로 나오신 부모님은 깜짝 놀라며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갑작스런 방문에 적이 놀란 표정이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안기듯 나는 두 팔을 벌려 부모님께 다가가 볼을 비비며 포옹을 하였다. 평소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 나는 우선 가방 속에서 새 옷을 꺼내어 입혀 드렸다. 어머니는 구슬 달린 블라우스가 곱다 하시면서도 쓸데없이 돈을 썼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그 모습이 꼭 어린애와 같았다. 난 어머니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 웃음을 선사했다.

“유 : 유유하게 오 남매 사로잡는 비밀스러운 새”

“옥 : 옥구슬 박혀 보배로운 새”

“열 : 열심히 살아준 공작새 닮은 유 여사 만나니 따봉.”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당에선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화분의 생강 이파리는 푸른빛을 더해갔다. 자연의 축복 속에서 아주 편안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새날이 밝았다.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잣나무는 탐스럽게 익어가고 마을길 곳곳에선 고향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고향 마을은 살구나무가 많이 자란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친구네 파란색 양철 지붕이 햇볕에 달궈져 열을 뿜고 밭의 경계에 심겨진 옥수수는 풍성한 결실을 위해 여름 온도에 담금질이 한창이다. 들길을 걸어 콩밭에 갔다.

밭 가운데 아버지 닮은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산비탈 밭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잡초도 뽑고,

밭 가장자리에 길게 뻗은 칡넝쿨을 잡아당겨 보라색 칡꽃도 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무 밑에서 꽃잎을 따 봉지에 담았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꽃잎이 참 예쁘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은 물론 이거니와 천연 에스트로겐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차로 끓여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 쬘 때 지하수로 이불을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어찌나 마음이 후련하고 시원한지 삼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 했다. 잠시 짬을 내 어머니 등을 밀어드리고 옥수수 껍질을 외양간 소구유에 넣어주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평화롭게 풀을 먹는 소의 눈을 보며 잠시 불심의 문밖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평소 바쁘게 다녀갔던 친정집에서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에서 구제 옷 가게를 하는 올케를 만나러갔다. 마침 장날이어서 장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어머니는 가는 데마다 우리 딸이랑 자가용 타고 왔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동물 파는 곳에 가서는 강아지 한 마리를 흥정해서 구매했다. 시골이라 농산물과 산 버섯 파는 곳이 많았다. 어머니를 따라 읍내에 가본 것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으로 기억 된다. 장에 따라가려고 떼를 쓰다가 신작로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치고 콧물에 눈물까지 범벅이 되어 울며 따라갔었다. 그런데 집에서 가져간 농산물이 다 팔릴 때까지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 난전에서 잔치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온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우시장도 보이고, 여기저기 둘러보는 동안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장 골목길이 정겹게 느껴졌다.

올케가 하는 가게에 갔을 때 외국인이 들어왔다. 올케는 잠시 가게를 비운 상태였다. 어머니는 체구가 작은 외국인에게 옥수수를 건네며 “여봐유? 잘 둘러 보셔. 주인장 곧 와유.”라고 말했다. 동남아 사람으로 보이는 외국인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혜를 들고 온 올케는 인사를 하며 파키스탄 단골손님 이라고 소개했다.

어머니는 “여봐유? 여기가 우리 며느리가 하는 가게유.”, “자주 오셔 총각.” 하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 말씀을 알아들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옷을 둘러보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지었다.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과의 만남은 옥수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가듯 내 마음속 작은 궁금증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부모님과 개울가에서 올갱이를 잡고 물놀이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내려 사위가 조용해 진 시간, 나는 빛바랜 앨범을 뒤지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부모님은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옛이야기 한 자락을 펼쳐 놓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결혼 이후로 모처럼 단잠에 빠졌던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아주 가벼웠다. 부모님께 무언가를 도와드리려고 시골을 찾았는데 오히려 내가 치유를 받은 느낌이다. 먼 산을 향해 기지개를 켜며 크게 소리쳐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