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혼식

최희경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사촌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던 중 작은아버지 내외 분께서 금혼식을 올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혼식? 조금은 낯선 단어라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결혼 후 5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는 의식’이라고 쓰여 있다. 두 분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하셨다하니 새삼 부부애가 존경스러웠다.

작은아버지와 작고하신 친정아버지는 유달리 형제애가 깊었다. 작은아버지는 단 한 번도 형님의 말에 토를 달아본 적이 없으며, 형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을 정도로 신뢰하셨다고 한다.

작은아버지는 우리가 내려가면 항상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술잔을 기울이셨다. ‘조금 더 살다 가지 왜 그리 빨리 가셨나?‘ 하는 원망도 늘어놓으시고 지금까지 내가 지역사회에서 인정받고 활동하는 것도 다 형님 덕이라고 말씀하신다. 작은아버지는 평생 묵묵히 농사 일만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전답을 다 팔았는데 그 중 팔십 프로를 작은아버지가 다시 사들였다고 한다. 형님 때문에 가슴에 쌓인 한이 많을 터인데도 단 한 번도 형님 원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원망하시기는커녕 오히려 고생하며 지은 농작물을 조카인 우리 육 남매에게 매년 변함없이 보내주신다.

목포역에 내렸다.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중 나온 여동생이 고맙고 반갑다. 택시를 타고 오빠 집으로 향했다. 작은아버지 부부의 금혼식 덕에 우리 육 남매도 만나게 되니 겸사겸사 즐거운 날이다. 행사장에 가기 전에 꽃가게부터 들렀다. 여름이라 꽃의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 여섯 개의 꽃다발을 만들었다. 서로 예쁘게 만든 꽃을 차지하려는 모습이 마치 어렸을 적, 마당에서 함께 뛰놀며 장난치던 모습 그대로이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무안군의 회산 백련지에서는 매년 8월 연꽃축제가 열린다. 백련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백련白蓮이 드넓은 방죽에 무리지어 피어난다. 백련지가 지금처럼 너른 연방죽으로 조성되게 된 것은 인근 마을의 한 부부가 12개의 연을 방죽에 심은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연꽃이 번식하여 지금은 십만 평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연꽃 군락지를 이루며 많은 여행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백련은 홍련처럼 꽃이 한꺼번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피고 지는 것이 특징이다. 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이 7월부터 9월까지로 일반 연꽃에 비해 훨씬 길어 사람들의 시선을 그만큼 오래 붙잡는다. 연꽃축제는 벌써 스무 번째로 연륜이 쌓일 만큼 볼거리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이번 축제는 “백련의 향기 백년의 사랑으로!“라는 주제로 연꽃의 의미를 담은 개막식 날에 진행된 금혼식 행사였다. 금혼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부부의 조건은 첫째, 무안군 내 9개 면에 거주해야 하며 둘째, 결혼한 지 오십 년이 넘는 금슬 좋은 부부여야 한다. 또한 그분들의 직계자녀, 며느리, 손자 손녀도 다복하고 모범적으로 사는 가정이 추천 대상이었다.

전국에 폭염 주의보가 내리고 내리 쬐는 햇볕에 살이 익을 것처럼 무더운 날씨였지만, 삼삼오오 행사장으로 모여드는 가족과 관광객의 표정은 행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밝기만 했다. 먼저 온 다른 가족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사촌들과 자리를 잡아둔 다음 두 분이 준비하고 계실 분장실로 갔다.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두 분 이마에 굵게 파인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여느 젊은 신랑신부 보다도 훨씬 멋지고 아름답게 보였다. 반백년을 함께 해로하시면서 행복한 때도 많으셨겠지만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는가! 두 분께서 살아오신 길이 농사를 짓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가 씨를 뿌려 수확을 하기까지에는 온갖 시련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가뭄이 시작되면 논밭에 물대기 걱정이 많았을 것이고, 홍수가 나면 하늘을 원망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곡식이 잘 자라도록 때맞춰 비료를 주거나 약을 치고, 김도 매야한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고생하시는 두 분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애써 감추고 행사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회자의 진행에 맞춰 한 쌍 한 쌍 입장할 때마다 우레와 같은 축하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회자는 각 부부에게 익살스러운 부연 설명으로 행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께서 입장하실 때는 그 옛날에 흔치 않았던 연애를 3년간이나 하셨던 부부라며 분위기를 한층 띄웠다. 이혼율이 높아진 세태에 결혼 50주년이 되어야 치를 수 있는 금혼식은 관광객에게 색다른 관심거리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금혼식 행사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백년해로하자는 의미로 반지를 교환하고, 지역 군수의 덕담으로 식은 마무리 되었다. 작은아버지 부부는 가족과 꽃다발에 둘러싸여 해맑게 웃으시며 사진 찍기에 바쁘셨다.

모두가 바쁜 가운데 나는 잠시 식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삶의 지혜 한 구절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오랜 세월동안 건강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온 비결은 서로 존중하며 농부로서 긍지를 갖고 자연에서 얻는 작은 것에서도 기뻐하는 소소한 마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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