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순대

홍정희

오징어순대를 먹는데 불현듯 인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한 편의 드라마로 미화된 슬픈 밥벌이 쪽대본 시놉소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세상에 속 다 내어놓아 텅텅 비인

마음 구석마다 이것저것 맛난 것 꾸역꾸역 쑤셔 넣는다

누구는 아무래도 고기는 넣어야 하지 않느냐며 충고하고

누구는 꼭 찹쌀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난다고 훈수를 둔다

당면에 두부에 야채에 무엇을 넣든 그것만은 내 마음대로

터질 것 같은 몸뚱이 꽁꽁 여민 단도리로 찜통에 쪄지는 일상

세간의 도마에 얹혀 잘 벼린 칼날에 둥근 고리 채로 몸이 베어

그것도 모자라 쓰라린 양면에 비린 계란 물을 온통 뒤집어쓰고

뜨거운 기름 판에 소스라치게 지져져야 하는 어제 오늘 내일

그예 아리고 짜디짠 소스에 온몸이 마구 뭉개지고 터진 채로

사람들 입안에 들어가 씹히고 삼켜지는 고질병 같은 굴욕

어김없이 맛있네 맛없네 숱한 평판을 듣는 것이 무에 대수이랴

하루 이틀 견뎌온 것도 아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우리의 통속적이고 고단한 삶 자체가 만만한 안주이지 않겠는가

때로는 싱겁고 때로는 짜게 느껴지기도 하는 인간사라는 메뉴

언제 한 번이라도 우리 입맛에 딱 맞았던 때가 있긴 했던 걸까

오징어순대를 먹는데 뜬금없이 인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도 누구처럼 속이 비인 것도 모자라 몸통까지 할복하여

그예 볼품없는 모양새 납작한 몰골로 빨랫줄에 줄줄이 꿰어져도

반항도 변명도 고해성사도 없이 선량한 눈물만 땅에 흘릴 뿐

급박한 줄거리 예고 없이 힘겹게 이어지는 그저 현실이려니

이래서 해 아래 사는 일은 헛되고 헛되다며 입 앙 다문 채로

해풍 짠 바람에 기름기 없이 바짝 말라가고야 마는 저 꼴만은

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천행, 운이 좋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징어순대를 한 점 집어 입에 넣다 말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프로필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 청계문학상 수상

. 시집 <하늘 타는 길>

. 수필집 <세상이 처음 열리던 날이 이랬을까>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