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날에 추억

정 명 수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 왔다. 사람들은 무더위를 피해 산등성이나 강변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마지하거나, 물장구를 치며 더위를 쫓고 있으니 올 여름의 무더위도 가늠해 볼 수가 있을 것 같다.

몇 해 전, 한 여름은 유난히도 여름나기가 힘들었다. 무더위는 연일 기승을 부리고 대지는 불덩이처럼 열기를 내 품었다. 기상청은 폭염주의보를 발령하고 건강에 각별히 주의하라는 예보였다.

사람들은 한낮 이글거리는 불볕더위를 피해 계곡이나 해변을 찾아 나서거나 시원한 그늘 밑을 찾고 있었다. 밤에는 집에서 가까운 강변을 찾아 천막을 치고 강바람을 맞으며 열대야를 이겨내는 사람들이 늘고 만 있다는 소식이다.

무더운 날씨에 과일과 벼는 알차게 영글지만 채소는 생기를 잃고 출하량이 줄어 금값이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촌 생태계가 파괴되어 기온이 상승한 결과라고 한다.

그래도 내 어린 시절에는 폭염이 요즘처럼 기승을 부리진 않았다. 에어컨이 없어도 한 여름을 보낼 수가 있었고 부채 하나만으로도 더위를 이겨낼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무더운 날에도 또래들과 함께 마을 가까이에 있는 저수지의 얕은 곳에서 수영을 하거나 개천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농촌에서 태어난 탓으로 초등학교 고학년시절에는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들녘에 나가 비지땀을 흘리면서 잡초를 뽑거나 논에 물대기를 하고 밭도랑의 무너진 흙을 채워주는 일을 하며 농사일을 거들어야만 했다.

해질 무렵에 집에 돌아와 방금 길어온 물로 등물을 하며 더위를 쫓으면 지친 몸이 활기를 되찾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에는 마을 앞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를 피했다. 기척도 없이 살살 기어온 바람은 등 언저리를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더위를 잊게 했다.

어느덧 이글거리는 태양은 서산에 숨어들고 산 그림자는 말없이 마을을 덮는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수를 놓으며 조잘거리고 별똥별은 배설물을 지구를 향해 한없이 쏟아낸다.

보석처럼 영롱한 별빛은 푸르고 드높은 하늘 저편에서 반짝거리며 눈부시게 빛난다. 한여름 밤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가족들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뜰에 멍석을 깔고 앉아 저녁을 먹고 난 후 모닥불을 피워 모기를 쫓으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한가롭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때에 밤참으로 나온 수박 한 덩어리는 별미중의 별미이고 가족 사랑의 정이 넘치는 포근함으로 온가족을 사로잡았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더위를 이겨내던 그때 그 시절이 오늘에 와 정겨워지고 그립다.

오늘날은 핵가족 시대가 되어 그들끼리 계곡이나 해변을 찾아 나서거나 집근처 강가에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지새우는 젊은이들을 보게 된다. 적어도 내 어린 시절에는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오손 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며 보냈었다. 그래서 여름나기가 한결 수월했었는데 지금은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한 여름 더위를 이겨내는 방법 중에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보양식이다. 토종닭을 잡아 찹쌀과 마늘을 넣고 오래도록 끓인 닭죽 한 그릇은 더위에 지쳐 입맛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미각을 돋우고 영양을 보충하는 별미였다. 지금은 온갖 한약재를 넣어 다양한 이름이 붙은 삼계탕을 끓여 내놓고 있지만 예전의 닭백숙만 못한 것 같다.

이렇듯 닭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인기 먹 거리였으니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여름을 이겨내던 유년의 그리움이 어른거린다.

간혹 복날에 개를 잡아 보신탕이라고 친구들과 어울려 복 땜도 했다. 요즈음은 사시사철 먹는 음식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그 이름도 사철탕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시대의 변화를 절감한다.

한 여름 불볕더위는 벼가 자라고 과일이 영그는 데 제격이다. 벼나 과일은 햇살이 뜨거워야 쌀알이나 열매가 알차다. 사람이 사는 데는 불편해도 농사를 짓는 데는 유익한 절기이니 이 모두가 다 자연의 섭리이기에 이를 어쩌랴.

옛날 우리 조상들은 시원한 모시옷이나 통풍이 잘된 삼베옷을 입고 부채질을 하며 여름을 보냈었다. 옛 어르신들은 마을 앞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남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았고 물가에서 등물을 치며 무더위를 이겨냈으니 생각만 해도 장하신 분들이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부채 대신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어 더위를 쫓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더위를 못 이겨 해외휴양지를 찾아 나선 피서객들이 매년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물론 국내에 있는 피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여름나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지만 나에게는 사치다.

벌써부터 절기가 무색하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수은주가 30도를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는 우리 스스로가 자연환경을 파괴하여 만든 재앙이 아닌가,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어도 한 여름을 보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저자 프로필

동국대행정학과 졸업, 국방부 부이사관(전), 한국문인협회서울금천지부 회장역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수필집 <이제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흔적>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