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량머리

이분남

하절의 폭염에 기력 빠진 푸념이 데쳐져 시름시름 몸앓이가 시작되나 했더니 구메구메 시절이 숨어들었던가, 한밤 끝 더넘바람이 불쑥 방문 안에 들었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옴 쑥 몸을 옹그리며 여름내 방 귀퉁이에 밀쳐놓았던 홑이불을 더듬었다. 세월여류라, 그러고 보자니 자그럽게 귓전을 때리듯 울어대던 밖의 소리가 저만큼 밀려나 있고 그나 내도 걷듯 동동대다 아무렇게나 무늬 지는 격식 없는 그늘에 서 있다. 잠시 혼미한 시간이나 누구나 다 겪어내야만 하는 뻔한 것, 하필 그것이 궁금하다. 생량머리에 든 것이다.

늘 하던 일이라 새로울 것도 없거늘 그날 그가 입을 입성을 다림질하는 심사에 만감이 교차된다. 괜스레 긴장돼 와이셔츠 깃에 물을 자꾸 뿌려대는가 하면 바지 줄이 일자로 고정되지 않아 애를 먹여야 했다. 하물며 눈앞이 뿌예지는 바람에 옆에 잘 세워둔 다리미를 더듬다 손을 데일뻔하기도 했다.

겨우 벌 옷을 손질해 그늘에 걸어두고는 한참 바라다보았다. 옷깃 사이로 때 묻지 않은 순수와 열정이 충만한 촌스러운 청년 선생과 흰머리 지긋한 중년의 노(老) 교장이 들락날락 인다. 백감교집(百感交集)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리라. 무려 37년이란 세월이 어찌 백 개의 감정으로 표현될 수 있으리오 만, 아쉬움보다 감사함이 앞다퉈 나서는 것을 보면 교직을 잘 마무리해 정년을 맞게 되는 그의 세월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그는 퇴직 전 학교 구경도 시켜줄 겸 함께 출근하자고 나를 부추겼다. 방학이긴 하지만 근무 직원과 업무 교사가 있을 터인데 출근을 같이 하자니 뚱딴지같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던 터에 쑥스럽기 조차해서 거절했으나 직함이 주는 사모님의 마지막 행차일 터 그만 허락을 하고 말았다.

출출 여름비가 쏟아지는 아침 출근길은 비안개가 주는 야릇하며 농밀한 느낌 때문인지 운전하느라 긴장한 그와는 다르게 나는 조금씩 열뜨는 것이었다. 한 이불을 덮어도 마음은 열 개라더니 퇴임을 앞둔 그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이 군것은 아닌가 하여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한 시간여 그의 출근길은 국도였다. 처음에 익숙한 풍경이 점차 낯설다가 다시 익숙해질 무렵 그곳에 도착했다. 대로변을 좌회전하여 학교 교정으로 들어가며 잊지 않으려는 듯,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교정을 정성껏 설명하였다. 자신을 닮은 듯 넓고 소박한 집무실 그의 자리에 앉아 보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긴 세월이 모둠 지어 가슴으로 달려든다. 오늘 동반출근이 가벼이 달랑대는 철없는 내게 자신의 심정을 알려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든 화초에 물을 주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뻐근하다.

점심을 같이하자는 동료의 청을 물리고 그는 나를 데리고 전북으로 전출해 받은 첫 발령지를 가자고 했다. 그는 마지막 시점에서 처음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투명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 시절을 더듬어 젊은 자신을 찾아 긴 시간의 성실함을 증명해 보이려던 것은 아닐까 하여 기꺼이 동행했다. 내장산의 험한 갈재를 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두렵고 기대된다. 그 길에 그 사람이 묵어 정년이 되었듯, 그때의 어린나무는 고목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주는 묵직함과 헛헛함은 구불대는 갈재를 넘는 내내 마음 안에서 엷은 파동이 되었다. 아마 그도 그랬으리.

세월이 흘렀건만 더듬을수록 새로워지는 기억은 익숙한 골목골목에다 소소한 순간까지 토해냈다. 도시락을 싸서 들고 겨우 발걸음 하는 아이와 점심을 나르던 그 길의 고목나무, 그가 수업하던 교실과 운동장, 그가 손질했던 학교의 정원, 해마다 기르던 국화 하우스, 관사의 추억, 동네 입구의 택시 집, 슈퍼마켓, 미장원 집, 젊은 시절 밤을 새워 가며 동료들과 동양화를 주고받던 하숙집 그리고 셋방살이 하던 이발소 집. 과거이나 통째로 현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주저했지만, 꼭 그 자리에서 그 기억들과 그 사람들은 여전히 반기며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겨우 화색이 인다. 자신이 삼십 대 강 선생으로 존재함을 확인했으므로 한 인생의 잘 살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제 만난 듯 후일을 약속하며 돌아오는 내내 그의 발걸음은 탄탄했다.

큰 오점을 남기지 않고 직업인으로서 직을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며 축복이다. 그가 부탁한 퇴임사를 쓰며 앞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될 긍정과 감사를 많이 넣었다. 그러므로 그의 8월은 말일(末日)이 없을 것이다. 그가 살아있는 한 교직자로서의 정점인 8월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배우고 자라

저도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려고 했지만 늘 부족하기만 합니다.

교편을 잡으신 당신의 모습이

그동안 항상 자랑스러웠습니다.

새 출발을 하시는 아버지를 응원합니다.

건강하세요.”

(가족 퇴임 축하연에서 아들의 감사패)

생량머리에 들어 더넘바람이 불어오면 계절은 절정이다. 영글고 익어가는 풍요 속에 그의 계절 또한 풍요로울 것이 분명하다. 아껴두었던 파이팅 박수를 몽땅 꺼내 그에게 보내본다.

2017년 8월 그의 퇴임을 준비하며.

[작가소개]

수필가

테마수필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