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선물이다

김경만

깊고 길었던 겨울을 돌아 기어코 봄이 왔다. 세상은 싹이 돋고 새소리는 한층 맑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아득히 꽃은 또 핀다. 하릴없는 내 가슴에도 꽃이 피어난다. 갓 지은 밥처럼 고슬고슬한 봄볕이 참 좋은 요즘이다. 속내를 감춘 채 그에게 꽃발로 다가간다. 봄바람이 든다. 꽃물 흠씬 취해가는 봄날, 거침없이 길에 올랐다. 문텐로드를 지나 바람을 막고 서있는 갈맷길에 들어섰다. 길옆으로 수풀이 천사슬로 무성하다. 봄뜻이 완연하지만, 오늘도 내게 들키지 않으려고 멀찍이 돌아서 가는 차가운 바람이 불현듯 친구 얼굴들을 떠오르게 한다. 벚꽃 흐드러져 꽃눈 내리는 이 길을 초등학교 동무들과 함께 걷기로 하였다.

올봄에는 유난히 꽃길을 많이 걸었다. 이른 봄, 중학교 동기들과 수선화가 만발한 거제도의 공곶이 둘레길 도보여행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벗들과 함께한 이기대 해파랑길을 숨차게 걸어 오륙도를 가슴에 품는가 하면 초등학교 동무들과는 문텐로드와 갈맷길을 걷기로 하였다.

초등 동기회 집행부에 합류하였다. 이날을 위해, 어린 날 소풍을 기억하며 김밥을 싸고 달걀을 삶아 배낭에 담았다. 사이다와 귤도 그리고 막걸리와 사탕도 준비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마음이 아름다워지라고 꽃길을 택했고 산길을 오르며 가쁜 숨도 내어 보라고 등산 코스도 마련하였다. 햇빛 좋은 창에 앉아 송정 해변을 한눈에 펼쳐 볼 수 있는 3층 찻집을 통째로 빌려 정담 나눌 수 있게 예약해 두었다. 좋은 생각을 나누며 동해선 철길을 나란히 걷게 하려고 이도 산책로에 넣었다. 새소리도 함께할 것이고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끊겼던 기적 소리도 들릴 것이다. 그리하여 벗들에게 평화와 자유를 선물하리라. 흘리는 땅 방울과 스쳐 지나는 소나기는 격정의 즐거움을 주는 선물이 되어 두 발에 힘 꽉 주며 오히려 힘차게 비상할 것이다. 소나기에 자라난 무지개도 함께 하겠지. 이 모두가 어우러져 우리네 마음을 맑게 하리라. 웃음꽃이 만발할 거야…. 혼자 걷는 길은 침묵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두 차례에 걸친 사전답사 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송골 거렸던 땀방울을 꽃샘바람이 식어 삼킨다.

태평양에서 고래 등 타고 노는 꿈을 꾼 날, 우리는 동심을 앞세우고 모여들었다. 40여 년 만에 만나는 벗도 여럿 있었다. 사람이 선물임을 다시 느낀다. 내가 그리워하던 사람이 너였듯 네가 아련 거렸던 이가 나였기를 바라게 된다. 멀리 땅끝 마을에서 달려온 현주를 안으며 초등 5학년 때 그 소녀를 가슴에 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천수나 군위에서 달려온 인자도 졸업 후 처음이라 애틋하기 그지없다. 잊고 지냈던 이름들이 설렘으로 다가와 저마다 지고 온 보따리를 봄볕에 펴 말린다. 세월의 흐름 앞에 서먹함이 있었지만 이내 예전 동무가 되어 달무리 같은 무지개를 띄운다.

만남의 장소에 집결하여 문텐로드 초입을 향하다가 아름다운 광안대교와 오륙도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우정을 기록해 두고 들로 산으로 어깨동무 풀지 않고 함께 하였다. 우리가 함께 걷는 달맞이 길에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걸어본 적이 있던 길도 그 속에 다른 이들을 품으면 또 다른 길이 된다. 이 벚꽃이 지기 전에 찾아가 이슬을 털면 내 옷이 젖어 들고 나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이 때로는 낯설 때가 있다. 그 숲에 가서 서면 내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동무들과 함께 걷는 이 길이 새로운 이야기를 품기 시작한다.

산책로에 무리 지어 선 벚꽃 머금은 사스레피나무는 달빛을 기다리고 있건만 우리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행은 갈맷길 굽이돌아 꽃비 내리는 아늑한 쉼터에서, 정성스레 마련한 점심 도시락을 펼쳤다. 막걸리와 구수한 입담도 함께하니 봄 산이 들썩였다. 고소하다. 다시 산길을 돌고 돌아 송정에 도착하여 예정대로 전망 좋은 찻집에 모여 앉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추억에 잠겨 있을 때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진다. 목적지인 철길과 연결된 횟집을 어찌 가야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빗줄기가 약해진다. 소나기는 무지개를 불렀다. 철길을 따라 걷기를 유도하니 사납게 몰아치던 파도가 잠잠해지기 시작한 백사장으로 하나둘 뛰어든다. 우리는 하늘을 날고 구름 위를 거닐었다. 이날의 기억은 꿈속에서도 주저리 열리리라.

너무 아름다운 날이다. 기찻길 추억이 담긴 노래 부르며 이제는 멈추어버린 동해남부선 철길을 바람살을 등에 지고 무리 지어 걸었다.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청사포 절벽을 뚫고 휘돈다. 창조주 눈빛보다 더욱 그윽하고 부드럽게 청사포는 우리를 안아준다. 동해 거친 파도가 만든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 아담한 횟집에 저녁뜸에야 모여 앉았다. 술잔 나누며 얼큰할 때까지 동안의 삶을 나누고 또 나눈다. 술은 끝이 없고 인생도 우정도 그러하다. 좌중은 웃음살이 넘쳐난다. 나이 오십을 넘기고 보니 누구나 하나쯤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었다. 벗에게 서로 꺼내 보인다. 위로가 된다. 나누니 모두가 따뜻한 마음이 된다. 우리는 알 품은 갈매기와 함께하며 동해를 어루만졌다. 아쉬움으로 늦게야 집으로 향했다. 꽃은 다시 피어야 한다고 거리마다 불빛은 가득하다. 길을 묻는다. 그 불꽃은 내 등에 걸려 함께 걷고 있었다.

걸으면서 떨쳐내지 못할 상념은 없다고 하였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기억 속 옛 동무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으며 세상사 시름 떨쳐버렸다. 우리가 이렇게 걸은 이유가 어쩌면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 생각과 눈길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분명 마음자리는 변하기에.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는 이제 다시 만들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자산이란 생각을 한다. 이러함은 모으는 것보다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할 터이다. 오래도록 함께할 것이다. 순수가 머물면서 건넨 따뜻해진 가슴을 아름답게 간직하려 한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 봄날을 위해 건배.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을 술잔 나누며 풀 수 있는 벗들을 마음에 담는다. 인생에서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꼭 필요하리라.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위안이 될 말과 행동은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삶은 윤택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란지교를 꿈꾼다. 동행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라 하였다. 앞으로 남은 길 함께 걷는 길동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에게 묻게 된다. 인간 본질을 성찰하게 하는 고갱의 그림이 떠오른다. 벗이여. 자네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작가소개]

2017년 부산문학상 수상

저서 ‘동그랗게 웃기, 점멸등에 걸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