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띠

박래여

인중 주변에 거뭇거뭇 수염이 났다. 사실 수염은 아니다. 검은 띠다. 근래 일은 해야 하고, 몸은 천근이라 이 약, 저 약 복합적으로 장복한 것이 원인 같다. 스스로 약 부작용이라 해석한다. 신약을 통 먹지 않던 내가 올해는 툭 하면 먹게 된다. 덜 아프니까. 움직이기 편하니까. 안 먹고 아픈 것 보다 먹고 안 아픈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계기다. 어차피 환갑을 살았으니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도 든 탓이다. 이제 남은 것은 잘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어쨌든 비가 온다. 하필이면 단감 따려고 일꾼 대 놓은 날이다. 어제 오후에라도 일꾼 소급해서 단감을 딸 생각이었지만 일꾼이 없었다. 남편과 둘이 감산 가자니까 남편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자기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단다. 나는 나대로 마지막 산초를 거두어 왔다. 며칠 늦었다고 새들이 잔치를 해 버린 산초나무가 몇 그루나 된다. 까치밥 남겨두듯 산초가 적게 달린 것은 그냥 뒀다. 새들아, 열심히 먹고 살찌워라. 군담하면서.

새벽부터 잠을 설쳤다. 일꾼들에게 비 오면 단감 작업 못 한다고 연락했다가 또 비가 별로 올 것 같지 않아 다시 소집을 했다가, 번복을 하다가 결국에는 일꾼을 모시고 단감 산으로 갔다. 남편의 고집은 알아주는 것이고, 해야겠다. 맘먹은 것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마누라 말은 늘 귓등이다. 사실 한국의 남자들 중에 아내 말 잘 듣는 남자는 드물다. 특히 경상도 농촌에 사는 농사꾼은 더 고지식하다. 오랜 세월 길든 관습을 보고 자란 탓이 아닐까. 가부장적 집안에서 자란 남자일수록 더 고지식하다. 아내에게 지시하고 수용하기만을 강요할 뿐 타협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가끔 남편은 이렇게 생색을 낸다.

“나 같이 마누라 말 잘 듣는 남자 있나?”

“기분 좋을 때만 듣지. 그것도 이해타산 없을 때.”

톡 쏘아주는 것도 내 특기다. 남편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란 것이 없다. 손해를 볼지라도 아내 말을 듣지 않는다. 단감 따서 도매상 올리는 것을 며칠 늦추자고 해도 내 입만 아프다. 일주일에 세 번, 도매상으로 올라가는 단감 운송 화물차가 농협 앞에 온다. 화물차의 운행에 맞추어 작업을 한다. 사실 엊그제 작업을 해서 보내야 했는데 못 했다. 단감은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고 익어간다. 안달이 난 남편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는데도 감산으로 향했다. 나 역시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서둘러 작업복을 입고 감산으로 향했다.

과수원에 가면 풍성해서 좋다. 주황빛으로 물드는 단감이 나를 보고 환호하는 것 같다. ‘잘 있었니? 그새 많이도 컸네. 예쁘다.’ 나는 발그레 익은 단감을 만져주고 색깔이 고운 것과 상처 난 것들부터 딴다. 이슬이 앉은 것처럼 촉촉한 풀밭도 좋다. 어깨에 멘 가방이 금세 무겁다. 컨테이너에 단감을 쏟아부을 때도 조심스럽다. 서로 부딪혀 멍들지 않도록 갓난쟁이 다루듯 해야 하는 것이 생물이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 온 남편이 포기해야겠단다. 몇 박스 따 놓은 단감과 옷이 축축해진 일꾼에게 미안하다.

“말 좀 듣지. 괜히 아지매랑 총각을 고생시켰잖아. 미안해서 어쩌누?”

“당신은 왜 온 거야? 오지 말라니까. 말 좀 들어라.”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더라.”

“빨리 아지매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가라.”

남편이 등을 미는 바람에 겨우 단감 한 박스 따고 손을 놓았다. 아쉽기만 하다. 날만 좋으면 단감 따는 것이 재미있는데. 무거운 가방을 메고 가풀막을 오르내리는 것이 고되지만 아플 때는 아프더라도 일할 때는 즐겁다. 어떤 일이든 몸을 사리지 않는 편이다. ‘뻗을 때 뻗더라도 할 때는 제대로 하자.’는 것이 내 성격이다. 일단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남편의 지청구를 듣는다. 노동은 몸을 사려가며 해야 한다지만 몸 사리면 일이 되어야 말이지. 내가 작정하고 일터에 뛰어들자 남편이 질겁해서 단감 작업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은 과수원에서 들밥을 먹으며 즐길 참이었다. 남편에게 점심은 싸갖고 갈 테니 집에 오지 말라고 했었다. 들밥을 맛있게 만들려고 시장까지 잔뜩 봐다 놨는데. 모든 것이 비로 인해 망쳐버렸다. 과수원 너른 자리에 돗자리 깔고 앉아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누런 들녘과 오밀조밀한 촌락을 바라보며 먹는 밥맛이 꿀맛이었을 텐데. 집에서 날마다 먹는 똑같은 반찬도 들에 나가 먹으면 새로운 맛이 난다. 전원 풍경에 젖어 기계음과 자연음이 어우러져 내는 소리도 음악으로 들린다. 여러 가지 새들이 내는 소리는 또 얼마나 맑고 깊은가. 아름다운 관현악 공연을 놓쳤다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해 본다. 책임져!

집에 오자마자 단감을 깎아 아작아작 작살을 냈다. 몸은 고된데도 입맛은 왜 살아만 나는지. 단감 두 개를 먹고 잎사귀가 떨어지기 시작한 풋고추를 땄다. 배추도 제법 속이 차 오르기 시작하고, 무도 푸들푸들하다. 뒤쥐가 자꾸 텃밭을 뒤져서 한동안 애먹었는데. 이젠 마음 놓아도 될 것 같았다. 서리가 일찍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직 꽃이 피고 어린 고추를 다는 고추나무를 바라보며 이 한 봉지는 누굴 갖다 줄까. 손에 든 고추 소쿠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노란 호박꽃이 유난히 싱싱하고 예쁘다. 애호박 두 덩이도 땄다. 누구 주랴?

그런데 문자가 여러 개 들어와 있다. 연일 단감 주문이다. 다 다음 주에나 보낼 수 있다. 남편이 아직 제맛이 아니라고 못 보내게 하니 주문만 받는다. 그중 한 분이 오랜 팬이라고 써 주셨다. 그 문구가 고마워서 헤실헤실 웃었다. 해마다 단감 주문을 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단감 가격은 알아서 입금해 놓을 테니 단감 맛있을 때 보내달란다. 어찌 아니 고마우랴. 얼굴도 모르는 좋은 분들 덕에 내가 산다.

나는 거울을 보며 인중을 중심으로 수염이 난 것처럼 검은 띠를 두른 자국을 본다. 조금 엷어지긴 했지만, 어찌 보면 동그스름한 눈썹처럼 예쁘게 그려졌다. 여자도 중성이 되면 수염이 나는가? 이것도 수염 축에 드는 것일까? 거울을 보며 또 헤실헤실 웃는다. 내가 아무래도 머릿속의 신경 줄 하나가 끊어진 모양이다. 못난이 행동은 혼자 다 하고 산다. 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든가. 모자람이 넘침만 못하다고 하든가. 둘 중 하나다. 그래도 비 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싱그럽다. 가을은 나뭇잎에서 티가 나는데.

[작가소개]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제8회 여수해양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저서 ‘푸름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