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시죠?

남상경

의뢰받은 일이 있어 직원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와 흰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다. 아, 남편의 고향 친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반갑다는 악수와 지난번 개업식에 못 와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이름은 좀체 떠오를 생각을 않는다.

꼬박 일 년 만에 만나는 것임은 알겠다. 온종일 제사음식을 장만하느라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막 정리하고 쉬려던 참에 두 아들을 데리고 예고 없이 찾아온 게 작년 설 전날 밤이었었다. 집안 가득 밴 기름 냄새로 속까지 뒤집혀 딱 눕고만 싶었던 그 시간, 형님댁으로 가던 길을 돌려 내 집으로 왔다고 했다. 내키지 않은 걸음이라 차를 돌려 내 집으로 왔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종일 기름 냄새에 찌든 나는 웃음의 기능까지 마비되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말에 떡국을 끓여 내어주면서도 별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간의 내 하던 양을 기억해 부디 오늘을 양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했었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이 부도를 맞고 가정까지 해체된 상태로 정처 없는 마음이 되었다는 그와 근 10년 만에 만난 게 아마 4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보인 그를, 산으로 냇가로 그리고 조기축구회가 한창인 운동장으로 데리고 다니며 남편은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자 애썼다. 그럼에도 친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삶의 공기가 채워지지 않는 듯 보였다. 나갔다가 들어오면 그저 잠시 땀 흘린 뒤의 일시적인 흥분만을 보일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나흘을 잠자리도 변변하게 내줄 수 없는 고향 친구의 집에서 우리의 방식에 따르며 지내다 돌아갔고, 이후로도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 하루씩 묵어가고는 했다. 친구니까 굳이 어떤 말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최대한 묻지 않고 편하게 해 주려고 딴에는 노력했으나, 그의 방문횟수가 잦아질수록 우리의 생활에 균형이 깨지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마음이 강했던 것이 작년 설 전날 밤이었다.

안으로 들게 해 식탁 의자를 빼 주고 달달한 커피를 타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간의 간단한 안부를 나누는 동안까지도 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십 분, 이십 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이름은 ‘ㅅ’ 자만 머릿속에서 뱅뱅 돌뿐 도무지 떠오르질 않아 슬슬 난감해지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영영 얼굴까지 기억 못 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다시는 미리부터 겁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막연한 두려움까지 무섭게 달려든다. 조금 덜 가까운 친구였다면 별 고민 없이 나는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요. 도와주세요.” 하며 넉살 좋게 물었을 테지만, 그에게 그 물음은 대단한 결례가 될 것이라 정말 당황스럽다.

이런 내 상황을 알 리 없는 그는, 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 들떠 있는 듯 보였다. 아주 짧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상황설명을 하고는 휴대폰에 자신들이 나눈 카톡을 보여주며 설명하기에 바빠졌다. 그 모습이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당하게도 보여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진심 어린 축하를 해 주었다. 하지만 내 나이 또래 애인 사진을 내보이며 “어때? 아가씨 같지?” 하는 덴 나도 모르게 쿡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남편이 따로 운영하는 매장의 약도를 자세하게 그려주며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남편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꺼내 매치시켜 보고 있었다. 내게 속한 것들인데도 순전히 생각 따로 입 따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각기 다른 작동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니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런 것에 당황하지 않는다.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어 당황한 어쩔 수 없지만, 바로 생각이 안 난다면 그때는 이실직고할 참이다. 이제야 이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비슷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그저 잠깐의 건망증이겠거니 넘기던 것이 횟수가 반복되며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어느 해 여름 고작 마흔일곱의 나이에 ‘갱년기 전조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버스정류장까지 눈물 훔치며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늙어가는 나를 봐 줄 수가 없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변하는 나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이유가 단지 갱년기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차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내 오래도록 생각했었다.

살다 보면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흔하지만, 그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반복되면 능숙해지나보다. 이제 당황하고 난감해하는 것은 아주 잠깐이다. 처음엔 생각을 짜내려 기를 쓰다가 그래도 여전히 생각의 답을 찾지 못하면 속 편하게 금방 포기해 버리고 만다. 여기에 미련 따위는 없다. 아니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젠 그렇다는 얘기다. 최대한 간단하게 결론짓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를 위해 더 노력한다. 그편이 나를 위한 더 이로운 선택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다 보니 쉽게 노여워지는 성질머리도 한풀 꺾인 느낌이다. 적어도 나이는 들었으면서 아무 데서나 흥분하는 꼴불견 어른은 되지 않겠구나! 안심하기까지 이르렀다. 정말 이보다 더한 무서운 병이 떡하니 기다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요즈음 내 최대의 목표는 “할 수 있을 때, 얼른 일어나 하자”가 자연스레 되어버렸다.

아마 머릿속에 든 남편 친구의 이름은 모조리 꺼낸 것 같은데도 앞에 앉은 친구의 이름과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어쩌면 이것도 최악의 상황엔 맞는지 안 맞는지조차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제 슬슬 포기하고 이실직고해야겠구나 싶었는데 번쩍, 조각난 ‘ㅅ’ 자의 퍼즐이 맞춰진다. “석재 씨!” 그제야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난 조용한 싸움을 일시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머리를 짜내느라 지치진 않은 것 같다. 다 그린 약도를 전해주며 “아무리 좋기로서니 불혹의 끝자락인 아줌마를 아가씨로 보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남편의 매장으로 가는 친구를 가벼운 마음으로 배웅하며, 길 건너 마을금고 주차장에 과일 차 아저씨가 싣고 온 철 이른 토마토를 사러 갈까 따라나서는데,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토마토 한 상자가 가게 안 의자에 얌전히 얹혀있다. 남편이 과일을 갈아 만든 주스로 아침 식사를 대신 한다는 것을 내가 이 친구에게 말한 적 있던가 생각하며 웃음을 짓는다.

[작가소개]

수필가

테마수필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