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비하게 등불을 매단 시장은 살아 있는 것들로 술렁인다. 후미진 계단에 자리한 행상을 만나 논둑에서 방금 캔 듯한 쑥과 달래 한 바구니를 무심하게 받아들고 종일 바람만 휘돌아 나갔을 집에 들어서니 마음이 순해진다. 지친 몸을 잠시 누이고 싶었으나 마음마저 무너질까 봐 겁이 나서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온종일 닫혀 있던 창문을 밀어젖혀 봄바람을 불러들이자니 산자락에 걸친 조각 햇살도 끼어들어 성큼 따라 왔다. 펑퍼짐하게 퍼질러 앉아도 되련만 방안으로 들어온 햇살은 겨우 궁둥이만 붙인 모양새다. 먼저 들어온 바람이 이리저리 햇살을 흔들어 자리를 잡아 주려 하지만 그만 되었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지난해 갈무리해 둔 히아신스는 수경재배한 지 두어 달이 되었다. 하지만 잎을 튼실하게 올리지 못해 그저 뿌리만 무성할 뿐 가늘디가는 꽃대가 올라 서너 개 꽃을 피우더니 시들어 간다.

어두컴컴한 주방 개수대에 고춧가루를 묻힌 채 냄새를 품은 초록색 허브가 그려진 그릇들이 손끝 재지 못한 주인을 만나 좀 채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며칠 묵혀 둔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가량없이 세제를 쏟아 붓다 깜짝 놀랐다. 이즈음 나는 무얼 쏟아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문득, 무엇이든 쏟아낼 큼직한 독 하나 있었으면 싶어 명치끝이 쓰린데 창문을 넘어온 바람이 히아신스의 시든 향기를 시름 달래듯 전한다. 정성 들여 쑥을 다듬었다. 어둑한 전등 밑 계단이라 그랬을까. 땅에서 방금 뽑힌 것처럼 물기조차 머금어 그토록 싱싱해 뵈던 쑥 한 봉지는 버려야 할 것이 더 많아 다듬고 나니 한 대접으로 줄었다.

거기다가 무른 잎을 따낸 달래는 뿌리와 줄기가 겨우 한 움큼 남았다. 그사이 조각 햇살은 높지 않은 산 뒤로 숨어버렸고 향기롭던 봄바람도 밤을 맞느라 스산하다. 쌀을 씻어 뜨물을 냄비에 받아 된장을 풀고 통마늘과 멸치를 넣어 한소끔 끓여내는 동안 쑥을 씻는 마음이 어수선하다. 맑은 물로 여러 번 헹구어내도 흙물이 없어지지 않는 쑥은 어디에서 자라 이리 흙을 뒤집어쓰면서 조차 생명을 지켜냈을까 싶어 애잔하다. 맑은 물이 나오도록 정갈하게 씻은 쑥을 채반에 받쳐놓고 무른 잎을 따내고 흙을 털어 다듬은 달래를 씻었다. 세상 살아내는 일도 이처럼 맑은 물로 헹구어 내듯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쑥대밭 같은 세상을 피해 숨어든 곳이 거친 광야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살아 내는 일이 소홀하지는 않더라도 마음은 평안했을 것이다. 광야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깨지고 곪아 욱신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살다 보니 살바람 불던 세월도 무심하게 흘렀다. 세상에서 뒤집어쓴 먼지를 광야에 들어서야 씻을 수 있던 그때가 내게는 감사의 나날이었고 평안이었다. 맑은 물에 헹구어진 쑥이나 달래처럼 내 삶도 정갈하게 씻기어 그분의 향기로 가득한 봄이면 좋겠다. 끓는 냄비에 정성으로 다듬어 정갈하게 씻은 쑥을 넣으니 들판의 봄 향기가 집안 가득 퍼져 싱그럽게 출렁댄다. 달래를 무치고 쑥국을 끓여 정갈한 식탁을 차리는 일은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나에게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이며 성찬이다.

쌀눈이 살아있는 고슬고슬한 밥이며 향기롭던 쑥국과 매콤한 달래 무침은 봄밤으로 스며든 지 오래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귀에 들리는 찬양이 가슴으로 읽히어 뜨거운 눈물이 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인생의 광야에서 허둥대며 살지만, 나를 지키신 이가 있어 내 삶을 아름답게 지탱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대견해서 감사한 봄밤이다. 지금 부는 살바람은 봄이 무르익는 디딤돌이며 꽃을 피울 에너지이니 내 인생의 살바람도 오래 불지 않고 쉬 잦아들어 봄꽃이 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근심 봄밤에 맡긴 채 끝도 없이 깊은 잠을 자고 싶다.

프로필

수필가

해드림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