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라 이리저리 뒹굴다가 휴대폰 뉴스를 훑어본다. 침대에 누운 채, 눈요기만 할 요량이었다. 소제목 앞에서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는 방법’이란 J 신문사 칼럼 제목이다.

삼십 대 후반인 여류작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는 방법을 알았단다. 참으로 대견하고 부럽다. 작가는 자신이 오랜 세월을 거쳐 알아낸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 정리했다.

첫째,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한번 해보는 것.

둘째, 단 며칠만이라도 완전한 휴식을 경험해 보는 것.

셋째, 단 하루라도 수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깡그리 접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젊은이들의 푸념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작가는 피카소의 명언과 괴테의 말을 자신의 논리로 질서정연하게 이끌어 가고 있다. 야무지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지탱해 간다고 생각하니 대견하고 감격스럽다.

나의 눈에는 어느새 돋보기가 걸쳐져 있고 흥분하여 난생처음 댓글을 단다. <이 멋진 아침에 완전 감동받았네요. 난 ‘내가 원했던 것’을 55년 만에 찾았답니다. 요즘의 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어요. 멋진 글 감사해요. 이제 출근 준비할 시간이네요.>

2014년 4월. 춤추듯 흐드러진 벚꽃이 여의도에 아름다운 시詩를 쓰고 있다. 해마다 봄이면 윤중로 벚꽃 속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벼 교통이 마비되곤 한다. 바람의 심술로 꽃비가 총총히 흩뿌리던 어느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 출발한 택시는 꽃비를 맞으며 여의도를 두 바퀴째 돌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나 문자로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던 친구와 함께였다.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늘 힘이 되어주던 친구와 마지막 데이트는 멋진 이별보다는 지나온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차창에 부딪히는 하얀 벚꽃의 신음이 서러움으로 범벅되었다. 택시에서 내려 동작대교를 통과하여 한강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름카페’에 들렀다. 우리는 마침 외국인 네 명이 일어난 전망 좋은 좌석에 앉았다. 맥주를 두어 잔 마시고 나니 한결 여유로운 느낌이다. 말로 전하지 못한 마음은 메일로 쓰겠다며, 친구를 위해 가벼운 농담까지 건넸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흘렀다. 퇴근 후에는 방에 틀어박혀 휴대폰으로 고스톱을 했다. 잠들지 못하는 날은 새벽까지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았다. 몇 달 동안 생기 없이 고스톱만 하는 나의 모습에, 걱정이 된 아들이 무슨 일이 있냐며 묻는다. “어머니, 혹시 사무실에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니면 무슨 고민거리가 있나요.” “아무 일도 없어.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이렇게 무기력한 어머니 모습은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반짝이는 눈빛으로 열심히 생활하는 어머니 모습만 보았는데, 하릴없는 노인이나 만지는 화투놀이만 하시잖아요. 무슨 걱정거리가 어머니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말씀 좀 해 보세요.” 직관력을 가진 아들의 눈은 언제나 매섭다. 아무리 연기를 해도 마음을 들킨다. 어느 날, 아파트를 구매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아온 부부가 있었다. 4개월 전에 금융계통에서 퇴직한 남편과 아내였다. 원하던 아파트 계약을 마치고 나서, 퇴직 후의 시간 관리에 대해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부부는 성공적인 시간 관리를 하고 있는지, 무척 행복한 표정으로 신나게 설명을 했다. 사진 찍기와 붓글씨, 여행을 하며, 며칠 전에는 평생교육원에 글쓰기 강좌도 등록했단다. 순간 내 귀가 번쩍 뜨였다. 바로 이것이야. 곧바로 컴퓨터에서 나도 등록을 했다.

2015년 1월.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개강을 맞았다. 40분이나 일찍 강의실에 도착했다. 한참 있으니 정 선생님이 두 번째로 도착하셔서, 반갑게 인사하고 나란히 맨 앞자리에 앉았다. 대학 졸업 후, 30여 년 만에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니, 가슴 벅차 기쁨을 주체하기 어렵다. 여고 시절, 틈만 나면 글을 써서 ‘여학생’이란 잡지에 투고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한 친구는 백일장이나 각종 대회마다 상을 휩쓸곤 했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나도 종종 상을 타기는 했다. 당시 나의 소원은 글을 잘 써서 내 이름이 활자화되는 것이었다. 정 선생님은 사정이 생겨 세 번 정도 참석 후 중단했다. 오랜 세월 가슴 밑바닥에 ‘꿈’을 묵혀왔었던 나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퇴근 후면 식탁에 앉아 떠오르는 대로 마구 썼다. 설날 연휴로 황금 같은 5일은 내게 최고 멋진 선물이 되었다.

다른 집과 달리 나와 아이들에게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명절은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하지만 이번 설날 연휴는 쉬지 않고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문장력은 부족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기억나는 대로 팔이 아프도록 썼다. 누군가 ‘글쓰기는 영혼의 배설물’이라고 한 말이 실감 났다. 무엇보다 우울증으로 침체하였던 내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가장인 내가 오랜만에 예전처럼 활력을 되찾으니, 두 아이가 누구보다 기뻐하며 응원했다.

오후에 고향 친구를 기다리느라 터미널 대합실에서 아침에 보았던 작가에 관한 뉴스를 검색했다. 그녀는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했다. ‘버리고, 다듬고, 고치고, 또 버리며’ 점점 좋아진다는 글쓰기 조언에 동감하였다. 글을 쓸 때 필요한 분량의 3배 정도 글을 써 놓고, 초고를 1/3로 줄이는 절제의 기술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늦은 밤 귀가하자마자, 그 작가가 추천한 좋은 책들을 메모했다.

나도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 하기로 했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자꾸만 스치는 생각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일요일 아침, 눈 뜨자마자 책꽂이의 스크랩북을 펼쳤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녀는 2008년 고3인 아들이 역사책을 써서 KBS 9시 뉴스에 나왔을 때, 문학평론가로서 아들의 책을 소개했었다. 스쳐 지나간 인연의 끈이 7년 만에 큰 감동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의 글에서는 색다른 향기가 났다. 적당하게 애국심도 있고, 지적 상식이 풍부하며, 알맞게 겸손한 냄새가 풍겼다.

그것이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다. 흔들리는 후배 청춘들을 위해 스스로 터득한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그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나 혼자만의 감동은 아닐 것이다. 수필 작가의 길로 접어든 나. 꽃 중년에 어울리는 열정과 몰입으로 느리지만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 길이 비록 가파르더라도 마음속 작은 생명으로 돋아난 소중한 새싹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키우고 싶다. 언젠가는 예쁜 꽃들과 탐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릴 것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