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엷어진 쌀쌀한 가을 날, 산책하는 길가에 나팔꽃 두 송이가 처연하게 피어 있다. 초여름에 피는 꽃인데, 제철을 놓치고 어찌 뒤늦게 피어있는 지 안쓰러워 보인다. 모정이 그리워서일까 구애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두 손으로 꽃을 감싸 볼에 대며 반겨주었다. 까만 씨앗 한 톨 뒤늦게 바람에 날려 와 싹을 틔웠는지, 아니면 산새들이 먹이로 물고가다 떨어뜨린 자리를 모태로 여기고 뿌리를 내렸나보다. 나팔꽃은 대개 개울가 나무나 울타리에 줄기를 뻗어 올라가는데, 잎이 말라버린 쑥부쟁이를 의지하고 줄기를 감아올린 것이 더욱 가엽다. 건조한 자갈밭에 싹을 틔우느라 고통이 많았을 것이다. 작든 크든 생명이 있는 곳에는 생성이 있고 또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창조주께서 주신 것 같다.

부실한 쑥부쟁이를 버팀목으로 삼고 미운 오리새끼처럼 외롭게 삶을 지탱하는 꽃의 운명이 부모를 잘못만나 버려진 아이 같다. 한 여름 행복하게 꽃을 피우던 우리 집 옥상의 나팔꽃이 생각난다. 그는 좋은 가문에 태어난 아기처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싹이 나면서 매일 물을 주고 보호대도 세워주며 줄기가 잘 뻗어 올라가도록 줄도 매어주고 온갖 정성을 들여 키웠다. 고생을 모른 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초여름 날 푸른 잎 사이사이 얼굴을 내밀고 자랑스럽게 꽃을 피웠다. 그런데 때늦게 가을 녘에 핀 나팔꽃은 튼실하게 자라지 못해 꽃송이가 가냘프다. 식물도 태어난 자리 따라 행복과 불행이 좌우 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인내와 용기로 진보라 꽃을 피워낸 기상이 갸륵해서 한참동안 꽃과 교감을 했다. 제철 초여름에 피지 못하고 늦가을에 피어난 나팔꽃을 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낀다. 나 역시 때를 놓치고 뒤 늦게 공부를 했다. 젊은 날에 학식이나 견문을 많이 저장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한으로 남아있다. 특히 요즘같이 글이 잘 풀리지 않아 텅 빈 그릇처럼 고갈 상태를 느낄 때면 더욱 비애를 느낀다. 총명할 때 지식을 머리에 가득 비축해두었다면 솟아나는 샘물처럼 푹푹 퍼내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하며 흘러간 세월을 아쉬워한다. 지금에 와서 열정을 품고 노력 해본들 새로운 저장은 고사하고 있는 것마저 잃어가는 형편이라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 그런데 시바타 도요의 시집「약해지지 마」를 읽으며 감명을 받았다. 그도 10대 어린 나이에 가세가 기울어 진학하지 못하고 최종학력이 초등학교다. 초혼에 실패하고 재혼했지만 그마저 사별하고 외롭게 지냈다. 취미로 무용을 하며 마음을 위로 받던 그는 관절이 약해져 무용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가 무료하게 홀로 지내는 것을 본 아들이 나이 들어도 글은 쓸 수 있다며 시를 써보라고 했다. 시바타 도요는 90이 넘은 나이에 아들의 권유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가난하게 살아온 질곡의 애환과 못 배운 한을 풀어내어 글을 쓰다 보니 카타르시스로 마음의 평화와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장례비로 준비해 두었던 100만 엔을 털어 아들에게 주며 시집을 출판해달라고 했다. 99세에 낸 첫 시집은 100만 부가 팔리고 <야에스북센터>에서 한 달 이상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 되어 인기가 높다. 문우로부터 그 시집을 선물 받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읽고 또 읽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 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 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약해지지 마」전문 그의 시를 떠올리며 나팔꽃에게 “늦었다고 서러워하지 마”라고 위로를 하며 약해지려는 내 마음에도 활기를 불어넣는다. 시비타 도요 시인 보다 아직 삼십 여년이 젊지 않느냐고.

프로필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