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

모처럼 아주 모처럼 내리 이틀을 집에서 뒹굴었다. 펑펑 늦잠을 자고 아점을 먹고 또 드러누워 책을 보다가 졸다가 했다. 얼마나 오랜만에 가져보는 이런 시간인지 모른다. 마침 아내도 아침 일찍 어디론가 자기 일을 찾아 나가버렸다. 혼자 거실에 드러누워 이것저것 손에 닿는 책들을 펼쳐보다 마음에 안 들면 리모컨으로 T.V를 켰다가 그것도 시원찮으면 꺼버리고 다시 책을 골라보는 나만의 유유자적한 시간이다.

하루에도 몇 권씩 배달되어 오는 책들을 겨우 봉투만 뜯어 쌓아놓은 채 그들의 정성과 사랑과 아픔을 잠시 헤아려보기도 하지만 어찌 작가의 감격이나 보람에야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누워 있으니 쌓아놓은 책들의 제목이 눈에 잘 보인다. 나도 잡지를 위해 원고청탁부터 편집까지 다 하는 처지라 그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아는데 저 많은 잡지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존경심이 솟는다. 그리고 살아있는 작가의 모습으로 보내져온 작품집들을 보며 또 놀란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의무일까 사명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숙명일까 버릇일까. 한 번 펼쳐 대충 제목만 훑어본 신문이며 다시 읽어볼까 하고 쿡 찢어 떼어낸 낱장 신문지가 몇 장 접혀있고 어디서 전화라도 오면 일어나기 싫어 손 가까이 둔 전화기까지 내 이틀은 그야말로 나만을 위한 내버려둠의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내 삶속에서 쉼을 가져보겠다고 생각했던 게 어느새 십년도 넘어버렸다.

2008년 나는 퇴직할 나이를 4.5년쯤 남겨두고 직장을 그만 두었다. 매어있는 삶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정년을 맞이하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고 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런 내 결정에 무조건 환영이었다.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한 2년쯤만 같이 여행을 다니자고 했다. 그도 좋을 것 같았다.목적지도 없이 떠나는 그런 여행을 하다 집이 그리워지면 돌아오고 다시 싫증이 나면 떠나면 되는 그런 날을 2년쯤만 갖자고 했다. 한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내 결심 문제였겠지만 명예퇴직일 며칠을 남기고 있는데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문학 강의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요청이 왔다. 물론 직장에 나가면서도 강의를 했었기에 일주일에 하루쯤이야 괜찮겠다 싶어 허락을 했고 퇴직 다음 주부터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하루라는 것이 그냥 하루가 아니었다. 하루 아니 한 시간을 위한 준비도 그렇고 그 하루가 앞뒤의 날들에 운신의 폭을 좁혀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왕 내킨 김이 되어버렸고 그래 한 강좌를 더 맡게 되고 지방에도 불려가고 특강도 하고 심사(審査)도 하다 보니 직장에 있을 때보다도 더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직장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되는데 이건 스케줄관리까지 해야 하는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내는 뭐하는 짓이냐고 했다. 그렇게 보내버린 시간이 어느새 10년도 더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그 사이 그만큼 더 늙어버렸고 몸에선 여기저기서 힘들다는 신호를 마구 보내왔다. 사실 쉰다는 것은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던 일을 놓고 멈춘다는 것이니 어차피 쉬고 나면 더 바쁘게 그 일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힘을 보충하여 더 잘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일 자체를 줄이지 않으면 일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잠시 미뤄둔 것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쉰다는 말보다는 잠시 멈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뒹굴뒹굴하는 것은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우리말에 등 따습고 배부르면 최고라는 말도 있지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눈꺼풀이 무거우면 그냥 감으면 되고 배고프면 일어나 적당히 요기를 하고 심심하면 텔레비전을 켜는 이런 망중한이 참으로 좋다. 이 나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과연 이런 시간을 몇 번이나 얼마나 가져보았을까. 늘 긴장되고 조급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날들이었다. 나만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를 위해서 쉴 수도 없던 시간들이었다. 아프지 않으면 움직여야 하는 시계추 같은 삶, 그렇게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호강에 초친’말인가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크게 뉘우치게 되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네 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았다. 요즘 같으면 큰 수술도 아닐 수 있지만 삼사십년 전에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다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의 수술 후에 일주일에서 열흘의 병원생활로 누워있는 시간은 결코 쉬는 것일 수 없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누워있는 것 자체로도 큰 노동이었다. 그 답답함과 지루함은 무엇으로도 해결이 안 되었다. 그때 제일 하고 싶은 게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거나 마음껏 뛰어보는 것이었다. 걷고 싶은 때 걷고, 뛰고 싶을 때 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삼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 내 이런 것도 얼마나 치기어린 것인가 싶어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지지만 그래도 이런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일 모레는 K시로 강의를 가야 한다. SRT를 타고 나주까지 가서 거기서 버스로 이동하여 K시 강의장으로 가야 한다. 요즘의 내 체력으로는 분명 힘이 들겠기에 사실 이틀의 내 이런 시간이 더욱 소중하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물려 돌아가고 이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쩜 지금 내 쉬는 시간도 어떤 보상일 수 있겠고 아니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 수도 있겠다.

갑자기 배가 출출해 진다. 무엇이든 먹어야 할까보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뒹굴고 있는데도 배는 고프니 그 또한 신기하다. 어쩠든 오늘은 맘껏 뒹굴며 오랜만의 망중한을 즐기고 싶다. 내 인생의 특별휴가, 나만의 시간, 오늘은 내 날이다. 이런 날이 언제 또 오기나 하겠는가.

약력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월간『한국수필』주간.

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