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었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 퍼 /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은 한명희 시, 장일남 곡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가곡으로 죽은 이의 신원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목비木碑를 뜻한다. ‘서러움 알알이 쌓인’ 돌무더기를 지키는 철모 쓴 비목 형상은 이 노래로 호국영령의 상징처럼 되었다.

테너 민병규님의 고희기념 독창회에 다녀온 이래 내 머릿속은 며칠 째 한 생각뿐이었다. 장소 섭외가 쉽지 않았다는 6월에 [6월의 노래]로 음악회를 연 예비역 준장의 충정이 비목에 닿았음인지 음률과 노랫말의 여운이 뇌리를 맴돌았다.

청탁받은 글의 주제를 정하자 6월에 써야겠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식물도감에도 나와 있지 않을 나무, 초연(硝煙)이 화약연기라는 것만 겨우 알 뿐 노래에 대한 감화만으로 글을 엮기엔 내 능력이 턱없이 모자라 애를 태우던 중이었다.

모를 일이다. 어떤 기운에라도 이끌린 듯 돌담 안으로 들어간 날의 그 무모함이라니. 담이 위압적이었거나 솟을대문이 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무엇에 혹했다한들 그리 불쑥 찾아들었을까. 수 없이 많은 끌림에 이끌려 살아온, 그리하여 이제 웬만한 것에는 초연할 때도 되었을 법한 나이 때였다.

처음 그 집 앞을 지날 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돌담이었다. 예봉산자락을 돌아오는 산책로가 가끔 어룡마을로 향하는 것이 그 때문이기도 했다. 평범한 돌로 나지막하게 쌓았을 뿐인데도 독특한 담이었다. 그 울안 또한 평범할 리 없어 다양한 수목이 어우러진 격조 있는 분위기였다. 때는 녹음방초 우거진 유월, 숲속에서 뻐꾸기가 목이 쉴 듯 울었다.

길을 따라 一자이던 돌담은 느티나무가 있는 사립에서 차 한 대 들어갈 길을 트며 우아한 춤사위를 펼치듯 안쪽으로 굽어들었다. 대문 없이도 바깥의 시선을 가리는 곡선이 운치와 실용을 살린 절묘한 구조였다. 햇빛이 울창한 수목사이를 비집고 내려와 이끼 핀 돌담 위에 아른거렸다.

현실감각을 일깨워 준 건 난리 난 듯 짖어대는 개들이었다. 놀랍고 당황스러워 머뭇거리자 마당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던 여주인이 개를 진정시키며 일어선다.

돌담이 하도 예뻐서 들어왔다며 내가 용서를 구하자, 웃으며 의자를 내왔다.

“예쁘죠? 이웃에 사는 분이 쌓아줬답니다.”

마음 좋아 보이는 여주인의 배려에 이웃 나들이 온 듯 금방 마음이 편해졌다.

“여기 온 지 26년 됐어요. 주변이 모두 논이고 밭이었지요. 나무는 그때 주위가 허전해서 마구 심었는데 이제는 베어내도 점점 울창해지네요. 개도 아는 사람이 기르다가 마당 넓다고 데려다 놓은 거예요”

경계심을 풀고 오수에 빠진 개를 바라보며 서로 간 정담이 이어졌다. 전직 교사였던 여주인은 셋째 아이를 이 집에서 낳았고, 비오면 장화 없이 다닐 수 없었던 동네에서 세 자녀를 기르며 직장을 다녔다고 한다. 강건함 속에 섬세하고 따뜻한 미술 선생님 분위기를 지닌 안주인의 손길이 울안 곳곳에 닿아있었다.

익은 딸기가 있을 거라며 그분이 채마밭으로 나간 사이, 나는 정원을 훑어보며 너도나도 서울로 갈 때, 서울에서 내려와, 그 불편을 감수하며 이만한 터를 일구고 가꿔온 혜안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주스를 마시며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책 정리는 계속되었다. 장마가 오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만한 장서를 지닌 책 주인은 어떤 분일까요?” 내가 책 더미에 자못 궁금해 하자 그제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가져왔다.

“남편이 비목 노랫말을 지었어요.”

화천에서 열린 비목문화제 팸플릿과 소책자를 받아든 그 순간 얼마나 놀랐던가.

단지 우연일까. 불쑥 들어간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마당에 아무도 없었다면 개에 놀라 뒤돌아갔을 것이다. 설사 부인과 마주쳤더라도 책을 정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시간까지 머물 리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곧 비목에 얽힌 작가 노트를 숙독한다. 장문의 노트에는 ‘초급장교로 60 년대 초 6.25전쟁 격전지였던 화천 백암산에서 복무하던 때의 생생한 체험이 담겨있었다.

“시심이 남달라서도 아니요 문재가 뛰어나서도 아닌 오직 그때의 비장했던 정감들을 꿰는 작업이기에〈비목〉은 수월하게 엮어졌다”고 했다. 가없는 영혼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자 전후 세대에게 전쟁의 비극을 잊지 말라고 노(老)장군이 불렀던 노래의 탄생 비화였다.

며칠 째 고심하던 글감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얻은 들뜬 마음 한편으로 과연 이 글이 전쟁의 고통을 모르고 자란 내가 쓸 소재인가. 이 노래를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작가의 말에 부끄러움은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현충일 노래도 잊을 만큼 안일하게 살아왔다는 반성 끝에 이 또한 소명이 아닐까. 크든 작든 그릇에도 용도가 있을 터, 내 그릇이 종지처럼 작을지라도 간장을 담으면 될 것이었다.

비목 노트 덕분에 ‘수월하게 엮여진' 글은 수필문학 7월호에 실리고, 나는 책을 들고 돌담집을 다시 찾는다. 그 인연으로 그해 현충원에서 열린 6.25전쟁 50주년 진혼예술제부터 오늘까지 DMZ에서, 비목공원에서, 이미시 서원에서 호국영령에 헌신하는 거목의 행보를 가까이서 보고 배우는 분복으로 내 작은 종지가 차고 넘친다.

하늘과 땅, 인간을 의미하는 이미시 서원 安居 앞뜰에는 10년째(6.25전쟁60주년) 호국의 불, 평화의 불, 영원의 불이 켜있다. 그분의 하루는 이 세 개의 촛불 앞에서 호국영령의 은덕을 기리고, 국운창성을 기원하는 묵념으로 시작된다. 과거의 불행을 잊어버리면 그 불행이 재연된다며 서원 뜰에서 매년 전쟁의 비참함을 잊지 말자는 不忘음악회도 열린다. 젊은 날 백암산에서 영감을 받은 비목의 업(業Karma)이 필생의 업으로 이어진 듯하다.

얼마 전에는 남양주시 소재 사유지 2000여 평을 헌납해 6.25전쟁에 대한 국내외 시, 소설, 수필. 영화, 종군 기사 등 전쟁 기록물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문예기념관을 짓겠다는 뜻을 밝혔다. 건축비는 모금할 계획이라고 한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모여 완성된 문예기념관이 후대에게 불망의 정신을 이어가는 성지가 되기를 소망한다.

큰 스승 한명희, 시대의 큰 나무를 우러른다.